정서영(58)은 조각가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뒤 독일 슈투트가르트 미술대학에서 수학하고 1996년 귀국해 국내 미술 현장에서 활발히 미술 활동을 하고 있다. 2002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박이소·황인기와 셋이서 한국관 대표작가로 참여한 이후 한국 미술계의 허리로 안착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 회고전 성격의 개인전 ‘오늘 본 것’을 하는 건 작가가 갖는 위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전시장에 작품이라고 보이는 것은 통념적인 조각이 아니다. 대신 해수욕장 감시탑, 싱크대, 사무용 책상, 의자, 민속 장판, 골프채, 시멘트 덩어리, 아이스크림 냉장고 등 일상의 재료나 사물을 차용하거나 변형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이런 게 조각 작품이야”라고 놀라다가도 개인적 추억까지 건드리는 작품들에 왠지 친근감이 들며 기분 좋게 관람하게 된다. 정 작가를 최근 전시장에서 만나 작품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독일에서 막 귀국한 90년대 중반은 한국 미술계에 X세대들이 포진하며 미술계를 살찌웠던 시기였다. 그는 “제가 유학 간 89년은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마침 박이소, 박찬경, 안규철, 김홍석, 김범 등의 작가와 백지숙(현 서울시립미술관장), 이영철 등의 평론가가 유학을 마치고 한꺼번에 돌아왔다”고 전했다. 열정이 넘쳤던 30대의 그는 비슷한 또래인 이들과 “한국 미술계에는 없는 새로운 미술언어를 만들자”며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풀, 미술 저널인 ‘포럼 A’등을 만드는 등 뭔가를 도모했다.
일상의 물건에 관심을 쏟게 된 것은 독일 유학시절부터였다. 94년 독일에서 가진 개인전에서 고무줄이 달린 조각을 했다. 그가 쓰는 조각 재료는 흙, 돌, 나무, 브론즈 등 전통적인 조각 재료가 아니다. 시멘트, 비닐 장판, 싸구려 카펫, 플라스틱 조화 등이다. 시멘트를 뭉쳐서 건물 코너에 조각 작품처럼 놓기도 했고, 시멘트 덩어리가 바위라도 되는 양 거기에 초록색 조화를 꽂았다. 카펫을 멍석처럼 둘둘 만 뒤 일부를 펼쳐 놓고 그 위엔 카펫으로 만든 탑 모양 조각을 올려놓았다.
정 작가는 “시멘트, 민속장판 등 재료 자체에 눈길이 먼저 갔다. 그런 일상적 재료, 사물 자체에는 특정한 시대의 문화적 조건이 녹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물과 재료를 거리에서 주로 찾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예컨대 산업화 시기 인기를 끌었던 값싼 건축 자재인 시멘트나 90년대 유행한 ‘민속 장판’이라 불린 장판무늬 시트형 바닥재 등에는 부자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서민들의 욕망이 숨어 있다. 정 작가는 조각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찾는 통상의 순서로 작업하지 않는다. 대신 이처럼 사회적 함의를 지닌 재료에 매력을 느끼고 그걸 어떻게 조각화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는 조각가로서의 정체성이 강해 보인다. 일상적 재료를 가져와 조각을 만들기도 하지만 사무용 책상, 싱크대 등 일상의 사물 그 자체를 약간의 변형을 가하거나 다른 사물과 결합해 놓고는 조각이라고 우긴다. 그런 태도는 짐짓 의뭉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조각 작품이라고 당당하게 놓여있는 사무용 책상, 싱크대 등은 사물이면서도 사물이 아닌 조각으로서의 아름다움과 미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조각이 별거야, 이런 형태적인 아름다움이 조각이지 않을까’ 생각하게끔 유도한다.
작가는 “생긴 것 자체가 조각적이라고 본 것은 아니다. 책상이나 싱크대 등은 사물로서는 기능적으로 완결된 물건이다. 그런 물건이 모양을 크게 바꾸지 않고도 놓이는 위치, 관객의 시선, 결합한 파트너 등에 따라 조각으로 변형되는 과정을 즐긴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그럼 조각이 뭐냐”고 물었다. 정 작가는 “대중이 생각하는 조각은 로댕의 조각, 권진규의 조각 등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시선이 닿지 않는 가운데 조각의 개념은 계속 움직여왔다. 내게 조각은 ‘형(形)’의 문제다. 형상이라고 하면 특정한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에 저는 형이라고만 한다. 형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생각, 감정, 상황 등의 다양한 요소가 변화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다가 그런 관계 속에서 불현듯 어떤 모습이 드러난다. 그런 ‘조각적 순간’을 형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전시장에는 93년 제작한 작품부터 이번 전시를 앞두고 제작한 신작 9점 등 30년에 걸친 총 33점의 작품이 나왔다. 여느 전시처럼 시간 순으로 공간을 구획해 배치하기보다는 한 공간에 섞어 놓았다.
통상 전시를 보여주는 방식인 가벽이나 조각 작품을 두는 좌대도 만들지 않았다. 공간의 구획은 네모난 흰색 금을 그어 영역을 표시하거나 금 안의 바닥을 흰색으로 칠한 2개의 영역이 전부다. 작품들이 확 트인 해변에 조가비처럼 듬성듬성 놓여 있다.
“전시장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싶었어요. 조각 작품을 두려고 좌대를 만들고 인제책(접근을 맞는 철사 줄)을 설치합니다. 조각은 ‘형’의 문제인데 가벽도, 인제책도 모두 작품과 관계를 맺으며 형에 영향을 주는 요소지요. 그것들이 눈앞에 있는 것이 용인이 안됐습니다.”
즉 가벽과 좌대를 없앤 것은 조각으로서의 완결성을 위해서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기후위기 시대 전시장 쓰레기 줄이기라는 시대적 요구를 실천한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됐다.
전시 제목 ‘오늘 본 것’은 작가가 매일 자신이 본 색상, 질감, 동세(動勢) 등을 짤막하게 기록하는 습관에서 따왔다. 11월 13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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