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아 비서실을 개편하고 새 출발을 다짐하자 추락하던 대통령 지지율도 반등 기미를 보이고 있다. 지난주 기자회견에서는 분골쇄신을, 국회 의장단 회동에선 여야 협치를 약속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윤 대통령의 결심이 무엇을 향해 있는지, 국정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초보 대통령을 뒷받침해야 할 국민의힘은 우왕좌왕하다 이제야 수술을 결정한 환자처럼 나약하기만 하다. 직전의 당대표는 어느새 투사로 변신해 ‘내부 총질’을 본격화했고 한때 보수의 새싹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준석 현상’은 1년 만에 ‘이준석 사태’로 변질됐다.
이 혼돈의 근저에는 집권 보수연합의 정체성 위기가 있다. 지금의 집권 세력은 선거를 앞두고 겨우 탄핵의 강만 건넜을 뿐 보수의 새 정체성을 중심으로 결집한 동맹이 아니다. 지지층도 정권 교체를 원했던 여러 집단의 단순 집합에 불과하다. 지난 대선에서 승리 공식처럼 회자되던 세대 포위론만 하더라도 급조된 응급처치였을 뿐 시간이 지날수록 20, 30대 여성은 더불어민주당으로 결집했고 젠더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여야를 막론하고 젠더 갈등과 세대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반지성주의적 갈라치기 정치로 빠져들 뿐 미래가 없다. 급조된 연합의 파산은 잘 된 일이고 예정된 미래였다. 이제야말로 집권여당은 중도를 포괄하는 확장적 보수연합으로 재구성돼야 한다.
윤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법고창신 자세로 과거 보수 정권의 공과를 되짚어보고 한국적 보수 특유의 역동성을 살려냈으면 좋겠다. 그 시기에 있었던 민주주의 후퇴와 인권 탄압의 부끄러운 과거를 덮을 수는 없지만 한국 사회 발전의 주요 고비마다 시대를 앞서가는 국가 혁신으로 새 길을 열었던 귀중한 교훈을 잊어서도 안 된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건국과 산업화, 노태우와 김영삼의 민주화와 세계화는 그 시대의 고정관념과 기득권을 깨고 새 질서를 만들어 왔던 국가 혁신의 세계적 모범 사례들이다. 이승만의 토지 개혁과 의무교육 전면 실시는 지주들의 경제적 토대를 허물고 양반 중심 신분질서를 타파하는 진보적 개혁이었다. 박정희는 공직 부패 척결과 귀족 정치 종식, 기업의 산업 보국을 내걸고 기득권을 깨면서 빈곤과 가부장 질서의 질곡에 묶여 있던 농촌 청년들에게 일자리와 소득 창출의 새 기회를 열어줬다.
민주화 이행기를 책임졌던 노태우와 김영삼은 여야 합의에 의한 직선제 개헌과 북방 외교, 세계화 개혁 등으로 나라 발전의 새 진로를 개척하며 선진국 도약의 길을 닦았다. 특히 김영삼의 공직자 재산 등록과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은 정권 창출에 협력했던 전통 보수 진영의 권력 기반을 붕괴시키는 단호한 조치였다. 한국적 보수 특유의 이런 역동성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과 재야 운동권의 끊임없는 정치적 도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보수 진영은 이런 도전을 자기 혁신의 동력으로 삼아 한국 사회 발전을 주도할 수 있었다.
윤 대통령이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의 길을 가지 않으려면 역동적 보수의 전통을 다시 살려야 한다. 이명박은 샐러리맨 신화를 바탕으로 실용 보수로의 전환을 시도했고, 박근혜도 선진복지국가를 보수 정치의 새 비전으로 내세웠지만 모두 선거 전략에 불과했고 집권 후 보수의 재구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과거 지도자들이 기득권의 대척점에서 정치를 혁신하고 민생을 개선했던 데 비해 이들은 집권과 정권 유지에 급급했을 뿐이다. 보수 정치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면, 그리고 지지 기반을 합리적 중도파까지 확장하려면 대통령이 가장 큰 국가적 과제에 도전해야 한다. 지도자가 가장 힘든 과제를 붙들고 씨름할 때 국민은 어려움을 참기도 하고 열광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도 결집할 수 있다. 큰길로 가야 세대 포위론 같은 샛길에서 헤매지 않는다.
새 정부가 목표로 하는 ‘저성장과 양극화 극복을 위한 구조 개혁과 도약 성장’은 20년 묵은 국가적 과제이자 국민적 합의다. 대통령이 이런 큰 목표에 국정 동력을 집중시켜야 소소한 갈등과 대립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연금개혁과 노동개혁은 대통령이 국정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기도 하다. 세상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누군가의 강한 열망에 의해서만 바뀐다. ‘겸손은 훌륭한 미덕이지만 정치가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경구가 아쉬운 시대다.
최영기(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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