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배우 강수연이 후배들에게 술을 사주며 던진 말은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의 대사가 돼 1300만 관객의 가슴에 남았다. 남성 중심의 영화판을 휘어잡으며 후배들의 등불이 돼 주고 “연기 잘하는 할머니 배우가 되는 게 꿈”이라던 강수연이 너무 일찍 하늘의 별이 됐다.
강수연의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 그 자체였다.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69년 동양방송(TBS) 전속 아역 배우로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KBS 드라마 ‘고교생 일기’(1983)가 큰 인기를 얻으며 손창민과 함께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 떠올랐다.
‘고래사냥 2’(1985)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 안의 블루’(199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등의 작품을 내놨다. 백상예술대상·춘사영화제·청룡영화상·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모두 휩쓸었다.
청춘스타 강수연은 임권택 감독을 만나 한국 배우 최초의 월드스타가 됐다. 86년 임 감독의 ‘씨받이’로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우리나라 배우가 수상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시아 배우 중에서도 최초였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로 임 감독과 다시 만난 강수연은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수상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한반도’(2006) ‘달빛 길어 올리기’(2007) ’주리’(2013)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2001년 14년 만의 드라마 복귀작인 ‘여인천하’에선 정난정 역으로 사랑받았다. 30%대 시청률을 기록한 이 드라마로 SBS 연기대상을 받았다.
강수연은 연기할 때 몸을 사리지 않았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서 삭발했을 때는 “비구니 역이어서 머리를 깎는 건 당연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고래사냥 2’에선 원효대교에서 한강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대역 없이 소화했다. ‘여인천하’에선 한겨울에 얇은 소복만 입은 채 얼음물에 들어갔다.
현장에선 동료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아낌없이 밥과 술을 샀고 영화계 ‘맏언니’로 대소사에 앞장섰다. 스크린쿼터 수호천사단 부단장을 맡아 미국의 통상압력에도 맞섰다.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외압 논란에 휩싸인 2015~2017년엔 집행위원장을 맡아 영화제 부활에 앞장섰다. 박근혜정부는 당시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영화제 측에 인사조치를 요구해 파문이 일었다. 강수연은 2015년 기자간담회에서 “부산국제영화제는 대한민국의 영화제가 아니라 아시아 최대의 영화제, 세계 영화인이 주목하는 영화제”라며 “정치적이든 상업적이든 어떤 편향으로도 치우치면 안 된다. 예술적 완성도 외에 어떤 것도 영화를 선정하는 데 개입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올해는 넷플릭스를 통해 9년 만의 복귀작인 연상호 감독의 SF물 ‘정이’를 선보일 예정이었지만, 유작이 됐다.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자택에서 뇌출혈 증세로 쓰러진 강수연은 7일 오후 3시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애정을 갖고 지켜낸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날 고(故)강수연배우장례위원회를 꾸렸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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