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어머니는 믿지 않는 아버지와 결혼 후, 심한 핍박으로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 그래도 자녀들은 보호해 주어 어려서부터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대학생 때 믿음은 없었지만 능력 있고 인간관계가 좋은 총학생회장 남자친구를 만났다. 그는 연애편지를 300통 이상 쓸 정도로 끔찍이 나를 사랑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을 받고 군에 가 있던 그에게 헤어지자는 편지를 썼더니, 그는 헤어질 바엔 차라리 죽겠다며 탈영을 하여 기찻길에 뛰어들었다. 정말 잘못될 것 같은 두려움과 이런 사랑이라면 나를 따라 믿음의 사람이 될 것 같아 결혼을 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남편은 교회를 멀리했고, 나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년쯤 지난 어느 날,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던 남편이 갑자기 이혼을 하자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그때, 이 세상이 어둠이고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곳이라는 성경 말씀을 정확히 알게됐다. 지금까지의 내 생각과 가치관들이 산산조각 나며 목사님께서 그토록 말씀하셨던,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주인이신 예수님을 무시하고, 내가 주인 되어 세상 행복을 찾아 살아온 삶이 너무 회개가 되었다. 내 마음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었다. 가슴을 치고 통회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나의 주인으로 영접했다.
그 무렵, 수산물 도매업으로 나날이 번창하던 남편의 사업이 IMF를 맞으며 한순간에 주저앉았다. 시골에서 교사를 하던 나는, 남편이 요청할 때마다 은행 대출을 받아 주었는데 1999년부터 월급 차압이 들어왔다. 월급은 이자로 다 나가고 원금은 평생 갚을 수 없었다. 남편은 무기력에 빠져 빚쟁이들을 피해 숨어 다니고, 전화도 끊어지고 부모님이 물려준 2층 양옥집까지 날아갔다. 결국 10평 원룸 월세로 숟가락만 들고 어린 아들 둘과 야반도주하듯 이사를 했다. 좁은 현관 신발 옆에 휴대용 버너로 밥을 하고 감자 한 박스를 사서 매일 감자와 김치만 먹고 살았다. 아이의 운동화가 다 떨어져도 못 사 주고, 겨우 굴러가는 자동차는 세금을 못 내 두 번이나 번호판을 뜯겼다. 결국 우리 부부는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렇게 쫄딱 망해야 남편이 주님께 오리라는 소망으로 모든 상황을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어느 날, 심방을 오신 목사님이 안타까워하시더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는 말라기 말씀을 해주셨다. 그 말씀을 받으며 비록 이 땅에선 단칸방이지만 하늘나라에 영원한 내 집이 있고, 나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빚 문제도 해결해 주시리란 확신이 섰다. 그리고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주님과의 사랑에 푹 빠져 살았다. 이런 의연한 내 모습에 남편은 행복해했고,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다. 그런 어느 날 짧은 머리에 검은 장갑을 낀 사채업자들이 교무실로 들이닥쳤다. 사채 500만 원을 한 달 내로 갚으라면서 ‘만약 기간 내 갚지 못하면, 교사를 못하게 될 줄 알아!’하는 협박에 어쩔 수 없이 각서를 썼다. ‘하나님! 이 종이 보셨죠? 어제 빚쟁이가 협박한 것 들으셨죠? 갚지 못하면 교사를 못하게 한대요. 꼭 해결해주세요!’ 새벽마다 각서를 들고 눈물로 기도했다. 놀랍게도 도무지 해결되지 않던 남편 가게가 처분되어 딱 그 날짜에 빚을 갚았다. 그러고도 많은 빚으로 빚쟁이들에게 고통을 겪었지만, 빌립보서 4장의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말씀으로 평강을 얻곤 했다.
그렇게 10년 간 월급차압을 당하며 버틸 때, 다시 시작한 남편의 하수도 파이프 대리점 사업이 번창해 매출이 60억까지 올랐다. 다음 해에 모든 빚을 갚고 월급차압도 풀렸다. 이제 겨우 숨 쉬고 사는가 했는데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이번에도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겼더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서서히 건강을 회복하며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왔다.
이 때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교사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한순간도 영혼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기독교 동아리를 조직해 기쁘게 복음을 전했다. 그 후 손자, 손녀가 태어나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인도해 주시리라 믿고 29년간의 교사 생활을 마치고 명예퇴직을 했다. 할머니 가정주부로 정신없는 생활을 하는데 각 학교에서 몇 개월씩 강사 요청이 들어왔다. 상황이 쉽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신다는 생각에 망설이지 않고 3년 동안 4개 학교 강사로 나갔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 찬양을 틀며 기도하고, 교무실에 커피 물을 끓여놓고 간식과 빵을 제공했다. 강사인데도 이런 섬김에 선생님들은 감격했고, 사탕을 받아 든 아이들 마음도 활짝 열리니 신나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었다. 나이는 점점 많아지지만, 나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전해진다면 언제든, 어디든 복음을 들고 달려갈 것이다.
박현희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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