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야 그들에게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둘,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야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셋,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100년 전 소파 방정환 선생이 발표한 세계 최초의 어린이 인권선언인 공약 3장의 내용이다. 올해는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을 맞는 해다.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이 선포됐고, 이듬해 5월 1일 첫 번째 어린이날 기념식이 열렸다. 5월 5일로 날짜가 바뀐 것은 1946년부터다.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라는 100년 전 방정환 선생의 메시지는 과연 얼마나 한국 사회에 뿌리내렸을까.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양희 국제아동인권센터 이사장을 만나 ‘정인이법’이 만들어진 후에도 반복되는 아동학대와 최근 논의가 활발해진 촉법소년 연령 하향 문제, 6·1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거론되는 청소년 참정권 확대 운동 등 아동인권 관련 이슈에 대해 물었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아동인권 실태를 확인하셨는데요, 한국은 어떤 수준이라고 평가하시나요.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이 아동권리선언문을 채택한 게 1924년이에요. 방정환 선생님의 어린이 헌장은 그보다 앞선 것이니까 정말 선구적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노키즈존이 계속 늘고 있어요. 아이들이 식당에 못 들어가는 나라에서 아이는 어떤 존재일까요. 오히려 애견카페가 늘고 있잖아요. 아직 갈 길이 멀죠.”
-한국의 아동인권을 파악할 수 있는 지표가 있나요.
“인권에는 너무 많은 요소가 있어서 포괄적으로 점수를 매기거나 평가하기가 힘들어요. 국가 간 비교보다 5년 전, 10년 전보다 얼마나 개선됐느냐가 중요하죠. 아이들의 생명권, 건강권과 관련해서 영아사망률이나 영양실태, 아동학대 같은 지표가 있는데 한국의 아동학대는 굉장히 놀랍고 특이한 경우죠. 80%가 가정에서 일어나요. 다른 나라 어디에도 가정 비율이 그렇게 높지 않아요. 외국은 시설과 일터의 비율이 훨씬 높아요. 다른 지표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청소년 자살률이 한때 1위였죠. 행복지수도 가장 낮고요.”
지난해 12월 발표된 한국의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는 OECD 22개국 가운데 최하위였다. 행복지수를 구성하는 6개 항목 중 건강, 삶의 만족, 어울림이 OECD 국가 중 가장 낮았고 소속감, 외로움은 끝에서 두 번째였다. 학교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5위로 상대적으로 높았다.
-아동학대의 해법으로 부모 교육이 많이 언급되는데요.
“한국 부모들이 스트레스가 굉장히 높아요. 일터에서 갖고 오는 스트레스가 많고 육아 자체의 스트레스도 높은 게 가정에서 아동학대가 일어나는 큰 요인이죠. 외국에는 고등학교에 아동 발달, 아동인권 강좌를 개설해요. 우리도 남녀 모두 필수로 그런 수업을 듣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0~2세 아이가 있는 집에는 간호사나 간호보조원의 가정 방문도 필요하다고 봐요. 영국과 미국 같은 복지 선진국들은 그렇게 많이 합니다. 1년에 한두 번씩 아이가 잘 발육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부모에게 양육 방법도 조언해줍니다. 만 2세부터는 어린이집에 갈 수 있으니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부모 상담이 가능하죠. 요즘 부모들이 경험하는 스트레스는 이전 부모 세대와는 차원이 달라요. 부모들을 지원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제도가 많이 도입됐으면 합니다.”
-지난해 ‘정인이법’이 제정되고 민법에서 자녀 징계권도 폐지됐습니다. 오는 6월부터는 아동학대치사죄의 법정형 상한선이 징역 22년 6개월로 높아집니다. 강화된 법적 조치들이 아동학대를 근절하는 효과가 있을까요.
“징계권 폐지는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큽니다. 교육을 내세워 부모가 아이를 함부로 할 수 있다는 게 오랫동안 안 좋은 영향을 줬어요. 하지만 아동학대 가해자에 대한 형량만 높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죠. 근본적으로 여러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제도적인 개선도 같이 이뤄지지 않으면 안 돼요. 때리는 건 신체 폭력만이 아니라 언어적인 폭력, 정서적인 폭력, 심리적인 폭력도 있죠. 아이의 발달 수준에 맞지 않는 것을 계속 강요하는 것 역시 폭력이고요. 그 부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 우리는 아직 거기까지 나아가지 못했어요.”
-최근 소년 범죄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와 촉법소년 연령 기준을 만 14세 미만에서 만 12세 미만으로 낮추겠다는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여론은 촉법소년 연령을 낮추자는 쪽이 훨씬 우세해 보입니다.
“12세로 형사 책임 연령을 낮추고 나서 청소년 흉악 범죄가 또 터지면 더 낮추자는 얘기가 안 나올까요. 유엔아동권리협약은 형사 미성년자 연령이 만 12세 이하인 국가에는 상향 조정하도록 권고하고 있어요. 2019년 한국에서 같은 논란이 있었을 때 만 14세를 유지할 것을 권고했고요. 12~14세 아이들의 범행이 많이 늘었는지, 재범률이 증가했는지를 먼저 따져봐야 합니다. 증가했다면 어떤 원인 때문인지를 면밀하게 분석해야죠. 재범률이 높다면 교정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는 거고요.”
-청소년 참정권 문제는 어떻습니까. 18세에 투표권이 없는 나라는 OECD 회원국 중에 한국이 유일합니다.
“북유럽에는 지방선거의 경우 16세부터 투표할 수 있는 나라도 있어요. 정치인들이 아동 청소년 정책에 무관심한 것도 그들에게 투표권이 없기 때문 아니겠어요. 청소년이 독자적으로 정치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면 그렇게 사고할 수 있도록 학교와 가정에서 교육이 이뤄져야 하는 거고요.”
-아동인권 제고를 위해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소관 부처가 여러 곳으로 뿔뿔이 나뉜 것부터 통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아동이 가정폭력의 피해자면 여성가족부 관할이고 아동학대면 보건복지부, 학교폭력이면 교육부, 그 외 범죄면 법무부 담당이에요. 다문화가정 아동은 여가부, 장애아동은 복지부고요. 어린이집은 복지부, 유치원은 교육부 관할이죠. 그렇다 보니 일관된 정책이 없이 짜깁기식이에요. 외국에서는 아동가족부나 가족부가 아동에 대한 모든 문제를 다룹니다. 저는 2012년부터 아동기본법 제정을 위해 노력해 왔어요. 아동복지법이 있지만 전쟁 이후 복지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그것만으로는 이제 충분하지 않거든요. 시설이나 복지 수혜 아동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아동들을 포괄할 수 있는 기본법이 있어야 합니다.”
■ 이양희 이사장은…
한국인 첫 유엔 인권기구 최고 책임자 역임
한국인 첫 유엔 인권기구 최고 책임자 역임

성균관대 아동·청소년학과 명예교수인 이양희(65) 국제아동인권센터 이사장은 2003년부터 10년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2007년 위원장으로 선출돼 한국인 최초로 유엔 인권 기구의 최고 책임자를 지냈다. 2014~2020년에는 유엔 인권이사회 미얀마 특별보고관을 역임했다. 한국인이 특별보고관이 된 것 역시 처음이었다.
이 이사장이 국제기구에서 활약하는 대표적인 여성 전문가가 된 데에는 부모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1970년대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걸었던 이철승 7선 의원이고 어머니 김창희 여사는 소아과 의사였다.
“부모님은 아들딸 차별 없이 오빠와 저를 키우셨어요.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정치적인 결정을 하실 때 꼭 제 의견을 물어보셨어요. 어머니를 생각하면 대학 1학년 때 미국에서 받았던 소포가 떠올라요. 작고 묵직한 소포에는 한복 자락을 뜯어 만든 주머니에 집 앞마당의 흙이 담겨 있었어요. ‘너는 대한민국의 딸이다. 잊지 말아라’는 편지와 함께요. 참 부담스러운 말씀이었는데 그게 저를 지키고 일으켜 세웠던 것 같아요.”
그는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망명길에 오른 부친을 따라 어린 시절 미국 생활을 했다. 어머니가 의사 보조원으로 취업해 가족을 부양했고 흑인 빈민가에서 흑인 학교를 다녔다. 차별받던 흑인들이 이방인인 그들을 이질감 없이 받아들여 줬고, 그에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아동인권과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원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면서였다. 학대받는 장애아동에 주목하면서 아동학대예방협회 일을 하게 됐고, 그게 아동인권으로 이어졌다.
이 이사장의 유엔 활동에는 아버지의 ‘큰 그림’이 있었다. 61년 유엔총회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했던 그가 ‘우리 딸이 여기서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제가 대학에 진학할 때 언젠가 유엔에서 일하게 되면 프랑스어가 꼭 필요하다고 전공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가 74년이에요. 한국이 유엔에 가입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때였는데, 30년 후 제가 유엔에서 불어를 쓰며 일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버지는 제가 특별보고관일 때 돌아가셨는데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시면 ‘왜 미얀마에 안 가고 여기 있니, 나는 괜찮아’ 그러시는 거예요. 그렇게 끝까지 제 일을 지지해주셨어요.”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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