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보 여성주의자들과 여성가족부가 거부하는 ‘건강가정기본법’의 제정 전 명칭은 ‘가족복지 기본법’이었다. 올림픽 이후 우리나라의 빠른 경제 성장과 국제 사회로의 개방화, 세계화에 맞춰 가정과 사회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1998년 대한가정학회와 한국가정관리학회가 주축이 돼 가정복지사 자격 제도를 추진했다. 2000년 가정복지 기본법 입법추진팀이 구성되면서 2001년 2월 9일 김성순 의원의 대표 발의로 처음 가정복지 기본법(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이후 각계 전문가의 의견 수렴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검토 작업을 거쳐 2003년 3월 보건복지부 주관 회의에서 ‘건강가정육성기본법’으로 법명이 변경됐다. 같은 해 7월 21일엔 박종웅 의원의 대표 발의로 ‘건강가정육성법(안)’이 입법 추진됐다. 이후 몇 차례의 공청회와 전문가 토론회를 거치며 3차 법안소위원회에서 ‘건강가정기본법’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건강가정기본법은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2003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최종적으로 2004년 2월 9일 건강가정기본법이 법률 제7155호로 공포됐다.
가정학계는 이런 과정에서 수십 차례, 당시 정부 부처인 보건복지부와 사회복지학계, 여성학계 등과 공청회, 방송토론회 등을 거쳤고 최종 타협안인 ‘건강가정기본법’이 대안으로 선정됐다. 이같이 기존의 건강가정기본법은 각고의 노력과 조정, 협의를 거쳐 제정됐다. 하지만 이번에 추진 중인 개정안은 그 개념과 법명을 바꾸는 대대적 변화를 거쳐야 함에도 제대로 된 학계 간 조율이나 공청회를 찾기 힘들다.
가정학계는 2004년 2월 이후 2005년 1월 1일 건강가정기본법이 시행되기까지 건강가정기본법 제정 과정에서 반대 뜻을 보여 온 한국가족사회복지학회, 여성학회와 지속적인 의견 조율을 통해 건강가정기본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동참하게 하고 의견 수렴을 해왔다. 타협과 조정을 통해 법이 제정됐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가족사회복지학회와 여성학계는 2004년 12월부터 ‘건강가정기본법’을 대체한 ‘가족지원기본법’을 제정하기 위한 심포지엄을 여는 등 건강가정기본법의 시행을 막기 위한 개정 시도를 지속해왔다.
건강가정기본법이 시행된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2005년 6월 장향숙 의원 대표 발의로 가족지원 법안이 발의됐고, ‘건강가정기본법 전부개정안’(김현미 의원 대표 발의)과 2006년 9월 ‘건강가정기본법 일부개정안’(문희 의원 대표 발의) 등 끊임없이 일부 또는 전면 개정안 발의가 15년 이상 지속해오고 있다. 이는 2004년 2월 건강가정기본법 제정까지 타협해온 두 학회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앞에서는 타협을, 뒤에서는 개정 시도를 하는 것은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학회와 학계에서는 할 수 없는 행위다. 앞에서는 학계의 이익을 챙기고 뒤에서는 다른 궁리를 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주장하는 민주적 행위도, 평등의 개념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또 이런 이중적인 행위를 하느라, 오히려 개정 법안의 내실화에는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건강가정기본법의 개정 내용이 진정 국민을 위한 서비스 제고를 위한 것이라면, 그 긴 세월 동안 국민의 마음에 닿지 않았을 까닭이 없고, 국회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을 리 없다. 지난 15년간 10여개가 넘는 건강가정기본법 일부 또는 전면 개정안이 통과되지 못한 것은 세월의 흐름에 폐기돼도 괜찮았을 주장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삶의 터전인 가정을 이념 싸움의 장으로 만들려는 의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개정안이었기 때문에 계속 폐기된 것이다.
주무 부처인 여성가족부도 이런 헛된 주장에 부화뇌동해 건강가정기본법의 구체적 실현을 위한 시행령과 시행규칙 등 개선, 보완에 15년 동안 손 놓고 뒷짐 지며 지낸 것은 아닌지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2010년 이후 법제사법위원회로부터 법 개정의 타당성이 없음을 통보받은 이후에도 여성계에서는 가족과 가정, 건강가정 개념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같은 방식의 건강가정기본법 일부 또는 전면 개정을 주장해 옴으로써 그 타당성과 신빙성을 잃었으며, 법안 내용의 내실화도 없음이 드러났다. 특히 2019년 말 개정안 추진 시 실패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끊임없이 법안과 의원 이름만 바꿔가며 실효성 없는 개정안 발의에만 몰두해온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실패한 법명인 ‘가족정책기본법’명으로 또다시 개정안을 추진하면서 법 내용이 별 차이를 나타내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지난 15년간 한국가족사회복지학회와 여성학계가 가족 서비스 전달 현장에서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가정학계에서는 가족 정책 전달체계인 건강가정지원센터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전담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 교재와 프로그램, 서비스를 확충해왔으며, 현장 실습 등도 지도해왔다. 그러나 한국가족사회복지학회나 여성학계는 뒷짐 지고 비난과 방해 외에 가정과 가족 사업의 현장에서 무얼 했는가. 실제로 가족을 만나고 프로그램 운영 현장에 참여해 어려움을 겪는 가족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이념적 논리만 앞세워 호도하는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 안에서 더 만족스러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현장에서 헌신하는 2000여명의 건강 가정사와 건강가정 사업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발전적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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