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밥값 못해 송구하다”는 국정원장

Է:2021-07-23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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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호 논설위원


요즘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정치인이나 지인들을 만나면 늘상 하는 발언이 “제가 아직 밥값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 송구하다”는 말이다. 다음 주면 취임한 지 딱 1년인데 남북관계가 나아지지 못해 국민과 임명권자한테 면목이 없다는 얘기다. 정권 임기 말이라 정부 고위 인사들이 다들 제 살 궁리하기 바쁜 마당에 밥값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나마 다행스럽다.

박 원장 말대로 남북관계는 취임 이후 나아지지 않고 있다. 그가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도 그렇다. 하지만 박 원장을 자리에 앉힌 건 꼭 남북관계 개선만 기대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를 임명한 뒤 국정원이 해온 많은 일들을 보면 밥값은 이미 충분히 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남북관계 다음으로 그를 앉힌 가장 중요한 이유가 국정원의 국내 정보수집 완전 폐지를 담은 국정원법 전면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원내에도 안착시키는 것이었는데 법이 잘 통과됐고 원내 반발도 무마시켰다. 이제 국내 정보수집과 관련해선 직원들도 ‘원장이 아니라 대통령이 시켜도 명령을 거부한다’는 인식이 확실히 틀어박혔다고 한다

1년 사이 원 업무도 크게 달라졌다. 박 원장은 취임 이후 ‘과학·사이버·여성’ 세 가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지난 1년 내내 국정원을 ‘미래형 정보기관’으로 탈바꿈하는 작업도 이뤄졌다. 그래서 예전과 달리 지금은 사이버, 우주정보, 인공지능(AI) 담당자들이 대우받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사람이 해오던 북한 정세 분석에도 요즘은 AI가 많이 쓰인다고 한다. 박 원장 부임 이후 달라진 또 다른 풍경 중 하나는 여성 간부들이 부쩍 늘어난 점이다. 얼마 전 국장급 회의를 했는데 일부 국장을 대신해 참석한 여성 중간간부들까지 포함했더니 회의 참석자 중 다수가 여성이어서 다들 깜짝 놀랐다는 후문이다. 여성이 근래 들어서야 비로소 중용되기 시작해 몇 년 더 지나면 고위직 여성 간부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박 원장이 코로나19 국면에서 국정원의 해외 조직이 부지런히 뛰어야 한다고 독려해 실제 역할을 많이 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각국의 코로나 확산 상황이나 백신 관련 동향 수집에 적극 나서 정부가 방역정책을 수립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얼마 전 국내로 들여온 백신도 국정원이 현지 네트워크를 가동한 덕분에 적기에 반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해외에서 코로나로 고립된 교민들을 신속히 국내로 데려오는 일에도 국정원의 역할이 컸다. 미얀마에서 유혈 사태가 났을 때도 교민들의 안전을 위해 국정원 직원들이 투입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아이티에서 납치됐다가 지난 10일 풀려난 한국인 선교사 부부의 석방에도 국정원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고 한다.

남북관계는 좋아지지 않았지만 다른 외교활동에 있어선 박 원장이 기여를 많이 했다. 특히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새 대북정책이 ‘대화’에 방점을 두게 하는 데 박 원장의 역할이 컸다. 박 원장은 미 정보 및 외교 당국자들을 수십 차례 만나 대북정책이 싱가포르 합의에서 시작하고 북한이 원하는 단계적 해결 방안에 기초하도록 설득 작업을 벌였다. 막판에 불발되긴 했지만 한·일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자민당 고위 관계자들을 접촉했던 이도 박 원장이다. 일본은 가을에 총선을 앞두고 있어 자민당부터 정상회담 개최 반대 목소리가 컸는데, 박 원장이 이를 무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박 원장이 이런 것들을 아무리 잘 해도 결국 남북관계가 좋아져야 ‘역시 박지원답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남북 간에는 현재 ‘물이 흐를 때도 있고 막힐 때도 있다’고 한다. 소통이 완전히 꽉 막히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박 원장도 얼마 전 한 자리에서 남북관계에 대해 “코로나로 꼬인 게 결국 코로나로 풀릴 것”이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남북이 코로나를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대화가 재개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얘기다. 박 원장이 현역 정치인일 때 앞일을 내다보는 데 있어선 여의도에서 최고였는데, 정말로 남북 간에 다시 훈풍이 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박 원장이 남은 임기에 더 분투해서 본인 말이 딱 맞아떨어졌음을 꼭 입증하기 바란다. 단순히 밥값만 하고 떠나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겠는가.

손병호 논설위원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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