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냉전 시기부터 최근까지 수십 년에 걸쳐 비밀리에 암호장비 업체를 운영하며 외국 정부의 기밀정보를 훔쳐봤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이 업체가 제작한 첨단 암호장비를 교묘하게 조작해 정보를 몰래 빼돌렸고 덕분에 미국은 중요한 외교 상황에서 상대의 속내를 손쉽게 꿰뚫어볼 수 있었다. 해당 업체의 조작된 암호장비를 도입한 국가는 한국과 일본, 스페인 등 미국의 동맹국을 포함해 무려 120개국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와 독일 ZDF방송은 11일(현지시간) CIA와 옛 서독 정보기관인 BND의 내부 문건과 관계자 구술 등을 토대로 미국과 서독이 스위스 암호장비 업체 ‘크립토AG’(사진)를 극비리에 공동 운영해 왔다고 보도했다. CIA와 BND는 크립토AG가 세계 각국에 판매한 암호장비를 이용해 각국의 비밀정보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BND는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크립토AG에서 손을 뗐으나 CIA는 2018년까지 지분을 보유해 왔다고 WP는 전했다.
크립토AG 창립자 보리스 하겔린은 러시아 출신 발명가로, 1940년 미국 이주 후 미군에 야전용 암호장비를 납품해 큰돈을 벌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스웨덴에 정착해 암호장비 공장을 설립하면서도 미 정부와의 끈은 유지했다. 미 정부는 하겔린의 최첨단 암호장비가 적성국가에 팔리지 못하게 막는 대신 보조금을 지급했다. 하겔린은 1951년 미 정부와 비밀 계약을 체결한 이후 스위스로 회사를 이전했다.
미국과 크립토AG의 관계는 1960년대 더욱 밀접해졌다. CIA와 국가안보국(NSA)은 전자회로 기술을 크립토AG에 이전해주는 대신 암호장비에 조작을 가할 권리를 얻어냈다. CIA는 1970년 하겔린이 숨진 이후 서독 BND를 끌어들여 크립토AG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CIA와 BND는 크립토AG 공작의 작전명을 ‘시소러스(Thesaurus)’로 칭했다가 1980년대에 ‘루비콘(Rubicon)’으로 바꿨다.
공작은 성공적이었다. 1978년 캠프 데이비드 중동 평화협상 당시 NSA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본국과 교환한 비밀 전문을 훤히 들여다봤다. 이집트 정부가 크립토AG의 장비를 사용했던 탓이었다.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사건 때는 석방 협상 중재를 맡은 알제리와 이란 사이에 오가던 대화의 85%를 가로챘다. NSA는 공작 과정에서 지미 카터 당시 미 대통령의 동생 빌리 카터가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정권의 비밀 로비스트였다는 사실을 포착하기도 했다.
크립토AG를 이용한 공작은 주로 미국의 동맹국과 우호국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크립토AG와 거래한 국가는 120여개국으로 추정되며 도입 사실이 확인된 국가는 62개국이다. WP는 영국과 이스라엘, 스웨덴, 스위스까지 최소 4개국이 크립토AG 공작 사실을 눈치 챘거나 미국 또는 서독으로부터 관련 정보를 제공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크립토AG 장비를 도입한 국가에는 한국도 포함됐다. 1981년 기준 크립토AG의 최대 고객은 사우디아라비아였으며 한국은 이란, 이탈리아 등에 이어 여덟 번째였다. 냉전 시기 미국의 가상적국이었던 구소련과 중국은 크립토AG와 거래하지 않았다. 다만 미국은 크립토AG를 보유한 국가가 구소련, 중국과 교환한 전문을 가로챔으로써 상당량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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