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그래도, 살아야겠다”

Է:2020-02-04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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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중구 동광동 주민센터에 가면 특별한 전시공간이 있다. 6·25전쟁 피난살이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40계단문화관’이다. 피난지 부산의 바닷가, 천변, 산자락을 가득 채운 피난민들과 판잣집들의 모습, 피난살이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는 당시 생활용품들이 전시돼 있다. 올해 70주년을 맞는 6·25전쟁의 실상을 피난민의 눈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공간이다.

이곳에 들를 때마다 전시관 한쪽 벽면에 붙어있는 짧은 문구가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와 당시 피난민들의 절박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불안함으로 가득 찬 피난지 부산으로 모여든 피난민들의 하루하루 삶은 1952년 부산에서 만들어진 찬송 “눈을 들어 하늘 보라”에 잘 드러나 있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고.”

전쟁과 함께 전염병 홍수 등 자연재해도 빈번히 발생했던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피난민들은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날 소망, 눈앞의 피붙이들을 어쨌든 살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읊조리듯 내뱉었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하지만 전쟁 속 한국교회는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위로와 평화의 메시지를 선포하기는커녕 분열을 거듭했다. 6·25전쟁 기간 한국 장로교는 고신(1952년), 기장(1953년), 통합과 합동(1959년) 교단으로 나뉘었다. 불가피한 분열의 명분이 있었겠지만, 당시 기독 피난민들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분열의 정당화가 아니라 따뜻한 위로와 소망이었다.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고 안타까워하던 기독 피난민들의 교회를 향한 불신은 깊어졌다. 다행히 “인애하신 우리 구주 의의 심판 하시는 날”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의 소망도 함께 깊어갔다. 그리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전쟁 당시 교회의 모습은 몰락 직전 중세교회를 떠올리게 한다. 십자군전쟁(1095~1291년)의 참혹함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속에서 인류 최악의 전염병인 흑사병(1347~1353)이 창궐했고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 오랜 전쟁과 치명적인 전염병의 공포 속에 살아야 했던 중세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희망이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이탈리아 로마와 프랑스 아비뇽을 거점으로 분열(1378~1417)을 거듭했다. 이러한 혼돈은 교회를 향한 깊은 불신을 만들었고 중세교회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암흑의 시대 속에서도 소망의 끈을 놓지 않고 교회 개혁을 꿈꾸던 중세의 신앙인들은, 전쟁과 전염병을 견디고 믿음을 지키며 다짐했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지난 수년간 마치 성경에 나오는 종말의 표징들을 연상하게 만드는 자연재해들이 계속되고 있다. 2017년 포항 지진은, 유학 시절인 199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경험한 대지진의 두려웠던 순간을 생생히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매년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전염병 홍수 태풍 미세먼지 등은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느끼게 했고 그때마다 그저 우리 가족만이라도 안전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버티곤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의 전 세계적 확산을 염려 가운데 지켜보는 오늘, 내 주변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걱정을 애써 지우고 다시금 나지막이 되뇐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우리는 기후변화와 환경문제의 피해자들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들이다. 무책임하게 저질러놓은 환경 파괴의 결과를, 사랑하는 우리 아들딸들과 그들의 아들딸들이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안쓰러움과 죄책감이 든다. 우리들이 죽은 후에도 이 땅에 남아있을 사랑하는 그들이, 맑은 공기와 깨끗한 하늘 아래 살아갔으면 좋겠다. 우리 아들딸들이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우리처럼 애절하게 한숨 쉬기보다는 “그래도, 살만하다”고 한마디 툭 던질 수 있는, 평범하지만 넉넉한 일상을 살면 정말 좋겠다.

탁지일(부산장신대 교수·현대종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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