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때부터 기도를 듣는 하나님을 믿었다. 준비된 사람을 쓰는 하나님, 기도를 듣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내 삶의 기반이다.
나는 활력이 넘치는 아이였다. 늘 뛰고 뛰어놀았다. 심부름 갈 때도 뛰었다. 어머니가 새벽에 동태찌개를 끓일 때 두부가 없으면 집에서 먼 가게로 내가 뛰어갔다. 냉장고도 없고 마트나 편의점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어디다 정신을 팔고 뛰었는지 두부를 사려는데 돈이 없었다. 분명 손에 들고 왔는데, 아뿔싸! 오던 길로 더 빨리 뛰어가 돈을 찾는다. 이때 반드시 기도했다. “주님, 돈 못 찾으면 엄마는 ‘덜레바리’라고 하겠죠. 그 말 듣기 싫어요.” 덜레바리는 이북 말로 차분치 못하고 덜렁거린다는 뜻이다. 기도하면 반드시 돈을 찾았다. 새벽이라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기도 했지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서울로 올라와 공부하면서 내 소원은 ‘이화’란 이름의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소원은 기도로 이어졌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해 이화동산에 들어갔다. 이화동산으로 진입한 건 내 힘이라 생각지 않았다. 기도 응답이라 믿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화여중 입학식 때 있던 일을 지금도 기억한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입학시험날 아름다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잔디밭에 한 무리의 아이와 어머니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기도했던 아이 모두 여기에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 그 무리는 장충초등학교에서 시험 보러 온 아이들과 어머니들이었다. 기도 모임 제안을 한 어머니가 잔디밭에서 대표로 기도했다. 함께 기도한 친구 모두가 합격했다.
이화는 하나님 뜻으로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여성교육기관이다. 자유 평화 사랑을 교훈으로 정하고 이를 삶에 녹여내도록 가르친다. 1956년 입학 당시 우리나라는 수직적이고 관료적인 구조의 사회였다. 군인 다음으로 이런 문화에서 살아야 했던 게 학생이었다. 그 시절에도 이화는 자유를 허용했다.
이화는 학생 하나하나의 특성을 존중했고, 잠재력이 극대화되도록 최고의 환경을 제공했다. 공부 외에도 즐겁고 잘할 수 있는 것을 발휘하도록 격려했다. 내겐 중학교 시절 이화동산에서 만나 평생 친구로 지내는 친구들이 있다. 10대 초반에 만나 70대 노인이 되기까지 변함없는 우정을 다지며 산다.
한 친구는 중학교 때부터 미술을 좋아해 판화가가 됐다. 다른 친구는 노래를 잘해 성악가가 됐다. 다른 친구는 사진을 잘 찍었다. 사진작가로 이화의 모든 행사에서 사진을 찍었다. 다른 한 친구는 스케이트 선수로 활약했다. 나는 농구선수였다. 서로 다르고 개성이 톡톡 튀는 우리 다섯의 모습은 이화 동산에서 자란, 꿈 많은 소녀의 축소판 그 자체다.
50년대 후반, 전쟁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던 시절 한국의 겨울은 정말 추웠다. 학교에 냉난방이 잘될 리 없던 시절이다. 겨울에 일정 온도로 내려가면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갔다. 여름에도 갑자기 날씨가 너무 더워지면 일찍 집에 갔다. 시험 기간에도 남다른 배려가 있었다. 이틀 시험 보면 하루는 쉬게 했다.
나는 교장은 물론이고 모든 교사가 우릴 존중한다는 걸 느끼며 이화동산에서 자랐다. 최초의 아동인권 옹호가 중 한 사람인 야누스 코르착은 “존중받은 아이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인격체가 된다”고 했다. 이화동산에서 최고의 교육과 배려, 존중을 받았다. 내 안에 인권 감수성이 있다면 그건 이화동산에서 훈련된 것이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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