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곡성’에 나오는 캐릭터 양이삼(김도윤)을 기억하시는지. 가톨릭 사제인 양이삼은 클라이맥스인 작품 말미에서 악마의 얼굴을 한 일본인(쿠니무라 준)을 대면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해보자. 양이삼의 이름은 왜 양이삼인가. 종구(곽도원) 효진(김환희)처럼 나머지 배역은 평범한데, 왜 그의 이름만 특이하냔 말이다. 영화평론가 이동진(51)은 온라인 콘텐츠 ‘무비딥’에서 양이삼의 작명 배경을 기가 막히게 추측하는데 간추리자면 이런 내용이다.
이름이 숫자인 ‘이삼’인 것으로 볼 때 성(姓)인 ‘양’도 ‘2’의 변형일 수 있다. 그렇다면 양이삼은 ‘223’으로 바꿀 수 있는데, 곡성은 기독교적 상징이 가득한 작품이고 양이삼은 사제다. ‘223’은 성경 어딘가에 있는 2장 23절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을까. 곡성은 오컬트 영화의 성격을 띤 작품이니 성경에서는 요한계시록 2장 23절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겠다.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억지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곡성을 본 사람이라면 영화 결말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해석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여기서 감독의 의도가 실제로 저랬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평론이라는 것은 감독이 매설한 의미를 캐면서, 감독조차 의도치 않은 작품 속 비밀을 발굴하는 작업일 테니까.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작품의 세계를 풍성하게 재창조하는 평론가의 일이니까.
이동진의 20년을 담다
이동진이 펴낸 평론집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를 소개하기 전에 그의 곡성 해설 일부를 기다랗게 늘어놓은 건 여기에 이동진의 강점이 담겼다고 판단해서다. 양이삼을 다룬 짤막한 분석에서 보듯 그는 편집증에 가까운 집중력이 만드는 ‘깊이’와, 온갖 분야에 두루 능통한 ‘넓이’를 모두 갖춘 일급의 평론가다. 이동진은 어떤 영화건 작품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누구도 보지 못한 무언가를 건져 올린다. 내러티브 비평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편집 촬영 음악이 각각 어떤 매력을 띠는지 짚어낸다. 어떤 이들에게 이동진은 빨간 안경을 쓰고 별점을 매기는 아저씨일 뿐이지만, 상당수 영화광한테 이동진은 대체 불가능한 절대적인 존재다.
책은 이동진이 20년간 쓴 글을 갈무리한 평론집이다. 1999년 극장에 내걸린 ‘벨벳 골드마인’부터 올해 개봉한 ‘기생충’까지 각종 매체에 발표했거나, 책에 담으려고 새로 쓴 평론 208편이 실렸다. 제목을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로 지은 이유는 책날개와 들머리에 등장하는 ‘작가의 말’에 담겨 있다. “나는 삶을 살고, 영화로 삶을 다시 한번 산다. 나는 영화를 만져보고 싶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처음 한 번은 극장 안에서, 그다음 한 번은 극장 밖에서.”
극장에서 시작된 영화가 저만치 떨어져서 관객을 향해 손짓하는 무언가라면, 극장을 나왔을 때 시작한 영화는 머리와 가슴에 파고들어 끝없이 되새김질 되는 이야기다. 언젠가 이동진은 좋은 영화의 정의를 묻자 “극장을 나섰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영화”라고 답한 적 있는데, 이 말이 맞다면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는 명제에 걸맞은 작품은 모두 좋은 영화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를 비평하는 일은 문학 평론에 비하면 어려운 작업일 수도 있다. 문학처럼 종이에 고여 있는 무언가를 상대하는 게 아니어서다. 영화는 스크린에 흘러가 버리는 영상이고, 장면마다 상당한 단위 정보량이 담겨 있는 텍스트다. 하지만 이동진은 이런 영화를 그 어느 장면 하나 허투루 보고 넘기지 않는다. 보석을 세공하듯 면도날 같은 문장으로 작품의 구조를 파헤친다.
가령 ‘기생충’을 다룬 글을 보자.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이 그렇듯 이 작품의 핵심 키워드는 계급이다. 그렇다면 기생충에서 계급의 차이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무엇인가. 바로 소통이다. 부잣집인 동익(이선균) 가족은 무전기까지 동원해 대화를 나누는데, 가난한 기택(송강호)의 가족은 와이파이를 사용할 때도 이웃집 신호를 훔쳐 써야 한다. 영화는 기택이 가족과 연락이 끊기면서, 그렇게 소통이 무망한 일이 돼버리면서 막을 내린다.
기택 가족 중에서 목숨을 잃는 유일한 사람이 가장 똑 부러지고 야무진 기정(박소담)이어야 했던 이유도 생각해봄 직하다. 이동진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기정은 미술치료라는 영역의 필요성을 연교(조여정)에게 새로 주입시킴으로써 누구의 자리도 빼앗지 않은 채 그만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그러니까 기정은 같은 하층 계급과 싸움을 벌이지 않고도 계급 상승의 가능성을 이끌어낸 극 중 유일한 인물인 셈이다. …계급 상승에 대한 욕망이 가장 적극적이었고 또 그럴 만한 능력도 컸던 기정이 작품의 말미에 살해당할 때 사라지는 것은 계급 상승의 사다리 자체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법
영화를 보는 방법이라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영화를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이동진은 이런 질문에 두 가지를 언급한 적이 있다. ①영화를 보고 난 뒤 글을 써라. ②영화를 볼 땐 카메라가 어딨는지 살펴라. 그의 평론을 읽으면 ②번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카메라의 시선이 가닿은 지점, 혹은 감독이 의도한 카메라의 움직임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열한 살 소녀들의 우정과 갈등을 그린 작품 ‘우리들’을 떠올려보자. 도입부에서 카메라는 한참 동안 피구 시합이 벌어지는 운동장에 우두망찰 서 있는 한 아이에 집중한다.
“카메라는 많은 아이들 중에서 오로지 한 소녀만 담는다. 바라보는 것만으론 소녀를 곤경에서 구해낼 수 없다. …하지만 카메라 역시 소녀 못지않게 간절하다. 끝내 곁을 내주는 친구 하나 없어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시선을 끌어당겨서라도, 카메라 자신만큼은 소녀를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듯이. 그리고 첫 순간부터 이 작고 귀한 영화는 관객의 마음을 얻는다.”
라디오 TV 팟캐스트를 통해 이동진의 팬이 된 사람이라면 그의 말(言)이 가진 힘에만 주목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이동진의 글이 얼마나 흥건한 매력을 지녔는지 느낄 수 있다. 이동진의 말이 다정다감하다면, 이동진의 글은 엄정하고 선득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500일의 썸머’를 다룬 글의 도입부가 대표적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우연을 재료로 삼는 마술이라는 것이다. 그 마술은 꼭 그 사람이어야 할 필요가 없는 우연을,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 하는 운명으로 바꾼다.”
전작인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시리즈(전 2권)가 그랬듯 신작 역시 900쪽이 넘는 묵직한 벽돌책이다(부메랑 인터뷰 시리즈의 쪽수를 더하면 1408페이지나 된다). 과거 그는 시리즈를 내면서 “양이 어느 순간 질로 전환되는 신비의 발화점이 도래하기를 헛되이 바란다”고 적었었다. 양이 질을 담보하는, 양질 전환의 법칙을 믿는 사람인 셈이다. 그리고 ‘영화는…’는 이 법칙이 그의 책에 통용된다는 사실을 확인케 해준다. 그러고 보니 평론가 이동진의 최대 강점은 ‘깊이’나 ‘넓이’가 아닌 성실함일 수도 있을 듯하다. 많은 영화 마니아에게 사랑방처럼 여겨지는 이동진의 블로그에는 그의 좌우명처럼 여겨지는 문장이 적혀 있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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