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 이후 54년 전 체결된 한일협정 체제를 청산하자는 주장이 정치권에서 나오고 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지난 3일 ‘1965년 체제 청산위원회’를 대통령 산하에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심 대표는 “한일 청구권협정의 불평등한 요소를 수용해서 우리 국민의 인권을 짓밟는 결정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여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 위원장인 최재성 의원도 “협정 자체가 한국의 준비와 정보 없이 경쟁 열위에 있는 상태에서 엉터리로 만든 것 아니냐”며 공감을 표시했다.
한일협정은 추진 과정부터 큰 논란을 빚은 게 사실이다. 이승만 정권 때인 51년 11월 미국의 주선으로 협상이 시작됐지만 강한 반일 정서 때문에 진전이 없었다. 5·16 쿠데타 이후 협상이 재개됐지만, 극비리에 이뤄진 협상 내용이 알려지면서 ‘굴욕외교’라는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64년에는 대학생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거세져 6·3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곡절을 겪었다.
14년간 7차례 회담 끝에 타결된 협정 내용도 논란에 휩싸였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투자금과 재산을 포기하고 3억 달러 무상자금과 2억 달러 차관을 지원하는 대신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에 합의했지만 한국 병탄의 불법성에 대한 명시적 문구가 없었다. 일본이 지급키로 한 자금의 성격이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금인지도 모호하게 처리됐다. 독도 인근을 중간수역으로 설정한 것도 민감한 민심을 건드렸다. 이는 박정희 정권에 큰 부담이 됐다.
1965년 체제 청산론은 이런 배경에 기인한다. 하지만 현실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협정을 둘러싼 우리 내부 혼란 정리같은 국내적 목적이라면 전문가들의 손을 빌리면 될 일이지 대통령 직속 기구까지 둘 필요가 없다. 협정 무효화나 재협상을 의미한다면 난감하다. 국가 사이에 맺은 조약은 쉽게 파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재협상하자고 해도 일본이 응할 리 만무하니 실익이 없고, 국제사회에서의 신뢰성만 훼손될 공산이 크다. 이 때문에 역대 정부에서도 협정의 유효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 배상 청구권이 살아 있다고 판결을 내린 대법원도 협정의 유효성을 전제로 그 취지와 문안들을 치밀하게 검토했다.
협정을 다시 하자는 건 수교 전 상태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다. 과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바꿔보겠다는 역사 리셋증후군이자 소아병적 원리주의와 다르지 않다. 한일협정 체제는 59년 연합국과 일본 사이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란 큰 테두리 안에서 이뤄졌다. 이 조약을 주도한 미국이 아시아에서 반공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일본에 대해 가혹한 배상 책임을 묻지 않고 동맹을 서둘렀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렇다고 재협상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일협정도 섣불리 파기를 주장할 게 아니라 내부에서 보완책을 모색하고 지루하지만 계속적인 외교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김의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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