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쉰 넘겨 다시 어린이 호칭 사용… 효도 마음 먹는 순간 병상 계셔
눈물 떠올리는 이름 이제 그만 ‘행복한 엄마’ 가꿔나갈 때
여러분은 엄마라 부릅니까, 어머니라 부릅니까. 미성년자는 대부분 엄마라 호칭한다. 사람마다, 집안 분위기 따라 다르겠지만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라 부르는 비율이 높아지지 않나 싶다. 남성보다 여성의 엄마 호칭 비율이 더 높으리라 짐작된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엄마를 ‘격식 갖추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어머니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라고 돼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엄마=어린이어, 어머니=성인어라 해서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우리말 역사를 살펴보면 시대적으로 엄마가 어머니보다 훨씬 앞선다. 엄마는 멀리 삼국시대 문헌에 벌써 ‘아마’란 표현으로 등장한다. 이게 15세기 무렵 ‘어마’로 변했다가 18세기에 엄마로 바뀌었다. 어머니는 18세기에 ‘어마니’란 표현으로 등장했다 19세기 말에 와서야 어머니란 이름을 굳혔다. 이래서 어머니보다 엄마 호칭이 더 친숙한 건지도 모른다.
나는 결혼을 계기로 30년 가까이 불러온 엄마를 대신해 ‘어무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냥 형들 따라 한 것이다. 어른이 되었으니 젖내 나는 엄마 호칭은 버리고 어머니라 불러야 하는데, 표준말 호칭이 어색해서인지 엉뚱하게 남부지방 방언인 어무이를 택한 것이다. 그러다 나이 오십줄에 다시 엄마로 되돌렸다. 엄마란 호칭이 얼마나 정겹고 아름다운가, 엄마라 부를 날이 앞으로 얼마나 될까, 혹여 남들이 마마보이라 놀려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급속 유턴한 것이다. 어머니가 어찌 엄마를 대신할 수 있으랴.
5월이면 누구나 엄마를 생각하게 된다. 생존 여부와 관계없이 포근하기 그지없는 엄마 품을 떠올리며 갖가지 상념에 젖는다. 나이깨나 먹은 사람들에게 엄마의 이름은 희생이요, 엄마의 이름은 인내요, 엄마의 이름은 눈물이다. 이런 엄마를 가장 잘 표현한 심순덕의 시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를 다시 읊어본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 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 속담에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엄마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신의 전지전능함에 틈이 생겼기에 엄마라는 존재가 탄생했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엄마는 신처럼 제 자녀의 삶 전체를 주관한다. 엄마가 거룩하고 위대한 이유, 감히 신과 동격이라 불려도 된다는 말이 나오는 까닭이다. 김종철의 시 ‘엄마 어머니 어머님’이 이런 엄마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누구나 세 분의 당신을 모시고 있다. 세상을 처음 열어주신 엄마, 세상을 업어주고 입혀주신 어머니, 세상을 깨닫게 하고 가르침 주시는 어머님. 엄마의 무릎에서 내려오면, 회초리로 사람 가르치는 어머니가 계시고, 세상을 얻기 위해 뛰다보면 부끄러움과 후회로 어머님 영전 앞에 잔 올린다. 성모 아닌 어머님이 세상 어디에 있더냐. 기도로 일깨우고 눈물로 고통 닦아 주신 엄마 어머니 어머님 모두가 거룩한 분이시다.”
엄마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니, 그럼 삼위일체? 역시 끝없이 복을 주는 분이시다. 우리가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 시리고 눈시울 적셔지는 것은 일종의 죄책감 때문 아닐까 싶다. 엄마의 무조건적 헌신과 희생을 당연시하고 일방적으로 도움 받기만 한 데 대한 죄송함의 표현이겠다. 그것 깨달을 즈음, 효도 좀 해볼까 할 때 엄마는 병석에 눕거나 내 곁에 계시지 않는다. 가슴 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심순덕이 묘사하는 그런 엄마 상(像)은 점차 찾기 어려워지겠지만 헌신과 희생은 엄마의 본능 아닌가 싶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엄마는 ‘아낌없는 나무’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환갑 바라보는 내 아내도 천생 헌신의 엄마다. 딸아이 셋 모두 장성했음에도 그들 뒤치다꺼리에 여념이 없다. 바깥일 겸하느라 매사 귀찮고 힘들 텐데도 싫은 기색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집에 들어설 때 아빠 대신 엄마 먼저 찾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엄마들은 발상의 전환을 좀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부모 세대와 똑같은 방식으로 굳이 희생을 각오할 필요가 있을까. 자녀에게 죄책감 느낄 게 아니라 가진 것 충분히 내어주면서도 자신의 존재 의미를 한껏 살려나가는 게 현명해 보인다. 직장 맘들 중에 자녀와 많은 시간 함께하지 못한다며 자책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다. 전업주부라고 모두 훌륭한 엄마가 될 수 없듯 직장 맘이라 해서 나쁜 엄마 될 이유는 결코 없다.
자녀에게 엄마는 존재 자체가 아름답고 위대하다. 모든 엄마는 그 이름만으로 높은 자존감을 가질 자격이 있다. 요즘 엄마는 세상 변화에 발맞춰 주어진 행복을 마음껏 누릴 필요가 있다. 완벽한 엄마가 아닐지라도 충분히 좋은 엄마면 성공이다. 엄마가 행복해야 자녀도 행복하지 않을까.

성기철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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