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나다 토론토의 세인트 마이클스 병원은 수술실에 ‘블랙박스’가 있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원인을 밝히기 위해 기를 쓰고 찾아내는 그 블랙박스와 역할이 비슷하다. TV 셋톱박스처럼 생겼는데 카메라와 마이크가 달렸고 각종 의료기기와 연결돼 있다. 수술의 전 과정이 여기에 녹화되고 녹음되고 기록된다. 의사와 간호사의 일거수일투족, 그들이 나누는 모든 대화, 복강경 수술 때 몸속에 들어가는 초소형 카메라의 영상, 혈압·맥박 등 환자의 실시간 상태, 수술실의 온도와 소음도까지. 이런 데이터를 열어보면 수술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항공기 블랙박스를 비행기록장치라고 하니까 이건 ‘수술기록장치’인 셈인데, 실제 비행기록장치에서 착안해 이 병원 의료진이 개발했다.
항공기 블랙박스는 항공사고의 원인 규명에 사용되지만 수술실 블랙박스는 의료사고의 예방을 위해 만들어졌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인간이 하는 수술도 완벽할 수 없다. 의료진의 실수를 최소화해야 환자가 안전하게 수술실을 나설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가 수술 중 언제 어디서 실수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런 논리로 2014년 이 장치를 개발한 외과 전문의 테오도르 그랜차로프는 처음 1년간 복강경 수술 138건에 블랙박스를 적용했다. 데이터를 분석하니 혈관과 장기를 잘못 건드리는 등의 크고 작은 실수가 수술 1건당 평균 20차례 발생했고 그로 인한 환자의 이상반응이 평균 8차례 나타났다. 실수의 84%는 수술 부위 조직의 박리와 재건 과정에 집중돼 있었으며, 이상반응의 37%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느 단계에서 어떤 실수가 빈발하는지 알아낸 병원은 그에 맞춰 의료진을 훈련시키고 실수를 유발하는 수술실 환경도 개선했다.
이 블랙박스는 북미와 유럽의 6개 병원이 도입했다. 같은 수술이라도 실수가 잦은 지점은 병원마다 조금씩 달랐다. 의료진 성향과 병원 특성에 따라 맞춤형 개선책을 마련하고 있다. 그랜차로프는 2017년부터 블랙박스에 인공지능을 접목하기 시작했다. 수술이 끝난 뒤 복기하는 수준을 넘어 수술 도중 실시간으로 실수를 찾아내 집도의에게 알려주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갑작스러운 출혈이 발생했을 때 다양한 출혈 현상을 학습한 인공지능 블랙박스가 원인을 압축해준다면 실수의 여파를 최소화할 수 있다.
제왕절개 수술 후 신생아가 사망한 경위를 분당차병원이 3년 동안 은폐했다. ‘수술실 CCTV’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지난해 의료기 영업사원의 대리수술 사건 때 수면 위로 불거졌던 문제다. 당시 토론회에서 의사단체와 환자단체의 찬반 논리가 확인됐다. 의사들은 수술 집중도 저하, 의사-환자 불신 조장, 인권 침해 우려 등을 이유로 반대한다. 환자단체는 마취 상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줄이고 의료사고 규명에 도움이 된다면서 “응급실은 다 CCTV를 설치하고 있는데 수술실은 왜 안 되느냐”고 말한다.
이 논쟁의 접점이 보이지 않는 것은 CCTV의 속성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감시’를 위한 장치여서 수술실 의료진을 위축시키며 방어진료로 기울게 한다는 우려가 나름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랜차로프의 블랙박스는 CCTV보다 훨씬 자세하게 수술실을 촬영하고 기록하지만 이런 갈등이 생기지 않았고 오히려 의사가 앞장서서 개발했다. ‘더 나은 수술’이 목적이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수술실의 CCTV와 블랙박스는 유사한 기능이라도 접근법에 따라 정반대 성격이 부여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둘 다 환자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CCTV의 소모적 갈등을 반복하느니 블랙박스를 개발해 보급하고 의사와 환자 모두를 위해 활용토록 유도하는 편이 차라리 생산적이지 않을까.
태원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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