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먼 ‘실손보험 간편 청구’… 가입자만 죽을 맛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A씨는 지방 출장을 갔다가 배가 아파 응급실을 찾았다. 요로결석 진단을 받고 진료비 11만원을 냈지만 실손의료보험에 가입해둬 별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보험사에서 병원진료확인서 등 서류를 추가 제출하라면서 일이 틀어졌다. 지방 병원까지 다녀오는 교통비와 시간을 고려하면 돈을 포기하는 게 나았다.

시민단체 ‘소비자와 함께’가 27일 공개한 실손보험 가입자의 사례다. 실손보험금 청구가 번거롭다는 지적이 여전하지만 개선의 움직임은 더디다. 금융 당국과 보건복지부가 ‘간편 청구’를 의제로 한 협의체를 구성하고, 정치권이 관련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의료계의 반대가 완강한데다 보건복지부, 보험사 등 이해관계자 간 협의가 어려운 탓이다.

실손보험은 국민 3300만명 이상이 가입한 ‘제2의 건강보험’이다. 하지만 막상 보험금을 받을 때는 불편함이 크다. 보험금 청구 시스템이 전산화되지 않은 탓에 병원이나 약국을 직접 찾아가 진단서 등 서류를 받고, 보험사에 제출해야 한다. 소액 보험금의 경우 아예 청구를 포기하는 일도 적지 않다. 소비자와 함께가 지난 4월 실손보험 가입자(성인) 645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한 결과 179명(27.8%)은 보험금 청구를 대체로 안 하거나 전혀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 때문에 정치권과 정부가 팔을 걷어붙였지만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2015년 금융 당국은 전산 프로그램을 통한 실손보험금 간편 청구 시스템 구축을 중장기 과제로 발표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금융위원회와 복지부가 함께 구성한 공·사보험 정책협의회도 이해관계자 간 견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27일 더불어민주당 고용진 의원이 개최한 ‘의료 소비자 편익 증진을 위한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 포럼에서도 입장차는 뚜렷했다. 이세라 대한의사협회 총무이사는 “민간보험과 소비자 간 계약에 의사가 개입되면 책임도 묻게 된다”며 “진료비 영수증만 보험사에 제출해 보험금을 지급받도록 간편화하고, 과다 청구 시 보험사가 해당 병원에 서류 제출을 요구하는 방향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청구 전산화로 비급여 진료비가 노출되거나 통일되는 것을 우려하는 부분이 더 크다는 지적도 있다.

보험업계는 대체로 실손보험금 청구 간편화에 긍정적인 분위기다. 소액 보험금이 나가면서 낙전수입은 줄겠지만 보험사에 대한 소비자 신뢰를 높일 수 있다는 기대가 깔려 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청구가 간편화되면 해당 업무에 대한 부담도 줄일 수 있고, 바로 보험금이 청구돼 지급된다는 점에서 소비자들의 호응도 얻을 것으로 본다”고 언급했다.

이해관계자 간 갈등에서 피해를 보는 건 결국 소비자다. 세부 방안에는 차이가 있지만 실손보험 청구가 간편화되면 소비자가 직접 발로 뛰며 서류를 뗄 필요가 없다. 나종연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일부 보험사와 대학병원들이 협업해서 청구과정을 간소화하고는 있지만 이용률이 아직 높지 않다. 또 대부분 소규모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실손보험금을 청구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갈 길이 멀다”고 지적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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