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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손영옥] 북한산 송이가 아닌데도

[내일을 열며-손영옥] 북한산 송이가 아닌데도 기사의 사진
이번 추석에 송이를 맛봤다. 가까운 친척이 산에서 막 캐온 것을 얻어온 터라 향이 더욱 살아있었다. 경북 상주에서 캐왔다는데도 그 쌉싸름한 송이가 북한의 맛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올 추석 최대 화제가 북한산 송이였기 때문일 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통해 보내온 송이버섯 2t이 미상봉 이산가족에게 추석 직전 배달됐고, 페이스북에는 송이버섯 받아든 감동 사연이 퍼졌다. 송이를 베어 물며 문득, 남한에도 북한 동포들이 살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새터민으로 불리는 탈북자들이다. 김복주씨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면 그런 연상 작용이 쉬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10여 년 전 혼자 남한으로 이주해 온 ‘탈북 가수’인 그녀는 이번 추석에도 문자로 인사를 보내왔다.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 은사자상을 수상한 임흥순 작가의 영상 작품 ‘북한산’에 등장했던 가수다. 수상작 ‘위로 공단’에서 무수한 노동자를 인터뷰했던 임 작가는 그 신작에서도 탈북자 김씨를 인터뷰했다. 분홍치마, 노랑저고리 차림을 한 채 북한산을 오르는 뒷모습으로만 등장하는 김씨가 행복했던 유년의 기억, 남한에서 사기당한 사연, 임진각으로 달려가 목 놓아 가족 이름을 부른 일 등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전부다. 그럼에도 뭉클한 감동을 주는 건 담박한 육성을 통해 북한도 우리와 똑같이 사람 사는 동네라는 걸 보여줘서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주방에 들어서면 엄마는 ‘무슨 남자가 주방에 들어서고 그래요! 볼꼴 사납게!’라고 해요. 그러면 아빠는 ‘종숙 동무, 외국에서는 요리사, 유명한 요리사들은 모두 다 남자들이라우’ 하시면서….” ‘닭살 커플’이었던 부모님을 회상하는 대목에서는 절로 미소가 번졌다. 이런 가정이라면 남한 땅에서 추석이나 설이면 반복적으로 이슈가 되는 ‘며느리 명절 스트레스’도 없을 것이다. 작품이 선보인 건 2015년 가을이다. 박근혜정부 하에서 남북 관계의 해빙은 생각조차 못하던 때였다. 탈북자의 육성으로 듣는 북한 사람들의 따뜻한 일상 이야기가 주는 감동의 진폭은 그래서 더 컸다.

정권이 바뀌고 상상초월의 속도로 남북 관계가 진전되고 있다. 장막은 일순 걷히는 듯하다.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이 가져다준 효과의 하나는 ‘북한도 똑같구나’하는 실감이다. 지난 4월의 판문점 1차 정상회담 때 처음 들은 김 위원장의 육성은 ‘(평양과 서울이)아, 멀다 하면 안 돼갔구나’하는 유머였다. 이런 감동은 북한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5·1경기장에 운집한 15만명 평양 사람들이 보낸 환호와 눈물의 이면에는 남한의 문 대통령 육성을 처음 들은 그 생경한 실감이 주는 감동이 있다고 방북에 동행했던 특별수행단 인사는 전했다.

북한에 먼 피붙이 하나 없는 나도 감동스러운데 이산가족이나 탈북자들의 기쁜 마음은 오죽할까. 수화기 너머 김씨는 “저야 좋지요”라며 기쁜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평양에도 나이키와 스마트폰이 등장했다는 후일담 보도에는 “거기도 사람 사는 덴데 다 똑같지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꾸 별나게 생각하니까 그렇지요”라고 말을 이어가는데 남한 땅에서 살아가는 힘겨움이 묻어났다. “북한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니라 여기 사람들도 다 정치적인 생각도 다르고 그러지 않냐”며 문맹을 빗대 북한을 너무 모르는 ‘북맹(北盲)’이 심각하다고 농담조로 말했다. ‘북맹’은 결국 탈북자를 바라보는 편견을 벗어달라는 호소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요즘처럼 변하는 한반도 정세라면 어느 순간, 남과 북 사이에 도로가 뚫리고 철도가 놓여 왕래가 잦아질 수도 있다. 통일 시대를 대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느꺼운 동포의식을 넘어 남과 북의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일 거라는 생각이 통화 후에 들었다. 다음 명절에는 한국살이가 좀 더 따뜻해졌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손영옥 문화부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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