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컬링 24년은 ‘무관심’과의 싸움이었다

Է:2018-02-23 19:22
:2018-02-23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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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국가대표팀 ‘팀 킴’이 나오기까지…

한국 컬링 24년은 ‘무관심’과의 싸움이었다
한국 컬링 여자 대표팀이 23일 강원도 강릉 컬링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컬링 여자 준결승 경기 도중 일본을 상대로 앞서가자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고 있다. 강릉=윤성호 기자
‘안경 선배’ 김은정이 이끄는 컬링 여자 국가대표팀 ‘팀 킴(Team Kim)’은 평창 동계올림픽 최고의 스타다. 쇼트트랙을 제외하고 메달이 전무하던 ‘동계스포츠 불모지’ 한국에서 이름과 경기규칙조차 낯선 컬링이 꽃을 피울 줄은 아무도 몰랐다.

컬링은 오랫동안 비인기종목 가운데 최고의 비인기종목이었다. 요강을 굴리고, 얼음판을 빗자루로 쓰는 이상한 놀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전용 경기장을 구할 수 없어 빙상장을 빌려 밤늦게 연습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지금의 화려함 뒤에 수많은 이의 눈물과 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컬링은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며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한국에 도입된 것은 그보다 6년 뒤다. 쌍방울그룹은 94년 동계스포츠 활성화의 하나로 대한컬링경기연맹을 창설했다. 이듬해 한국 대표팀은 일본에서 열린 태평양컬링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면서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국내 컬링 보급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김경두(62) 경북컬링훈련원장 겸 경북컬링협회 부회장이다. 경북컬링훈련원은 ‘팀 킴’을 배출한 요람이다.

김 원장은 본래 레슬링 선수였다. 그는 캘거리올림픽에서 열린 컬링 경기를 보면서 “이거라면 한국 선수들도 도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뒤로 컬링 공부에 뛰어들었다. 빙상장에 하우스(컬링 경기장 바닥에 그려진 큰 원)를 그려놓고 경기를 했다. 김 원장은 “페인트로 하우스를 그렸다가 쫓겨날 뻔하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김 원장은 ‘전용 훈련장 건립’ ‘선수 발굴’에 사력을 다했다. 일단 가족에게 먼저 컬링을 가르쳤다. 이들이 지금 한국 대표팀의 중추를 맡고 있다. 김민정 컬링 여자 대표팀 감독은 김 원장의 딸이다. 남자 대표팀의 김민찬 선수는 아들이다. 김 감독의 남편은 장반석 믹스더블 대표팀 감독이다.

황무지에 뿌린 씨앗은 10년도 안 돼 싹을 틔웠다. 2003년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에서 남자팀이 금메달, 여자팀이 은메달을 따내는 돌풍을 일으켰다. 2004년 세계주니어컬링선수권대회에선 남자팀이 4강에 진출했다. 2007년 2월 창춘 동계아시안게임에서는 남녀 컬링대표팀이 동반 우승을 일궈냈다.

그러나 컬링 대표팀은 ‘무관심’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컬링은 태릉선수촌 입소가 불가능한 ‘촌외 종목’으로 분류됐었다. 국가대표인데도 선수들은 선수촌 밖에서 자체적으로 숙식을 해결하며 훈련해야 했다. 2015년에서야 태릉선수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경기장 안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큰 대회가 열려도 경기장을 찾아오는 관중을 보긴 힘들었다.

설움을 겪던 한국 컬링은 여자 대표팀의 첫 올림픽 출전을 계기로 ‘볕’을 봤다.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데뷔한 여자 대표팀은 첫 경기에서 일본을 12대 7로 눌렀다. 최종 성적은 8위였지만 긴장감 넘치는 경기내용, 당구나 구슬치기를 연상케 하는 샷 장면은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24년 만에 한국 컬링은 가장 뜨거운 동계스포츠로 떠올랐다.

이현우 기자 base@kmib.co.kr

사진=윤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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