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빚 보고서’] 카드대란이 촉발… 부동산 부양책에 고삐 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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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감정이 북받친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주름진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르고, 단상을 향해 박수가 이어졌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직후였던 1998년 2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취임사는 우리 경제가 겪을 미래를 내다본 예언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우리 가계에 ‘빚의 굴레’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1997∼2005년: 신용카드가 ‘방아쇠’

외환위기 첫해 가계부채는 급변했다. 경기가 급속도로 악화하면서 맞은 첫 충격이었다. 13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대표 지표인 가계신용(일반 가정이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빌린 돈이나 카드 할부 구입 등으로 진 빚을 포괄한 가계부채)은 1997년 처음으로 200조원을 넘겼다. 다만 저축 등 가계의 ‘기초체력’이 탄탄해 이듬해 가계신용은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소비 감소는 막기 어려웠다. 1998년 민간의 최종 소비지출 증감률은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53년 이후 최저치인 -11.9%를 기록했다.

구제금융 졸업을 위해 내수를 살려야 했던 정부는 ‘신용카드’를 꺼내들었다. 1999년 5월 신용카드 한도(70만원)가 폐지됐다. 같은 해 8월 카드사용액에 대한 소득공제제도를 도입했다. 정부는 카드영수증 복권제까지 시행하는 등 카드소비 진작에 전력투구했다.

카드가 남발되자 빚이 쌓였다. 2000∼2003년 가계의 가처분소득은 15.5% 증가했지만 가계신용은 120%나 늘었다.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은 2000년 63.8%에서 2002년 113.3%로 폭증했다.

늘어난 빚은 대부분 저소득층에 집중됐다. 2000년까지 200만명 아래였던 신용불량자는 2004년 4월 말 382만4000명으로 급증했다. 2003년 한 해 늘어난 신용불량자 108만명 가운데 84%는 ‘신용카드 사용’이 원인이었다.

그나마 가계부채는 2004년 495조원에 육박했지만 전년 대비 증가율은 4.6%에 그쳤다. 카드 빚이 가계의 전체 빚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서였다. 과제를 넘겨받은 노무현정부는 신용불량자 축소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2006∼2012년:은행,‘주담대’에 빠지다

급한 불은 껐지만 더 위험한 불씨는 은행에서 자라고 있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수익성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 은행들은 일반 가계를 겨냥한 대출로 주요 영업대상을 바꿨다. 가계부채에서 은행 비중은 2002년 50%를 넘어섰다. 스탠다드차타드에 인수된 제일은행을 선두로 외국계 은행들이 이런 흐름을 주도했다.

특히 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이하 주담대)에 집중했다. 채무자가 빚을 갚을 수 있는지 정확히 평가할 능력이 없던 은행들은 주택을 담보로 잡았다. 주담대는 부동산 투기 열풍을 먹고 쉴 새 없이 커져갔다.

여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노무현정부는 집권 후반기에 부동산 정책 방향을 선회했다. 2005년부터 약 2년간 수도권 부동산 가격은 급등했고, 수도권 주택매매가격 상승률은 2006년에 20.3%(전년 대비)까지 이르렀다. 가계부채 증가율은 11.8%까지 치솟았다.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와 종합부동산세 등 억제정책을 내놓았지만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2007년 가계부채는 665조원을 넘어섰다.

뒤를 이은 이명박정부는 더 적극적으로 부동산 경기부양에 몰입했다. 지방 부동산이 들썩였고, 2010∼2012년 지방의 주택매매가격 상승률은 수도권을 3∼6.4% 앞질렀다. 여기에다 제2금융권 고금리 대출이 늘면서 가계부채의 질이 나빠졌다. 2007년 주담대에서 16.06%를 차지하던 상호금융 등 비은행예금취급기관 비율은 2012년 21.26%까지 올랐다.

가계부채는 2012년 1000조원대 문턱까지 다가섰다. 4∼5%를 오가던 경제성장률이 3% 아래로 떨어지면서 ‘성장 없는 빚’이라는 불안감은 한층 커져갔다.

2013년∼현재: 부동산 ‘부메랑’

박근혜정부에서 가계부채 움직임은 ‘최노믹스’(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경제정책)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최 전 부총리는 2014년 7월 취임과 함께 주택담보대출비율(LTV)과 DTI 규제를 완화했다. 명분은 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에게 집을 살 기회를 준다는 것이지만 실제론 침체된 경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노골적인 부동산 경기부양이었다. 이후 2개월 만에 주담대는 8조3000억원 폭증했다. 가계부채는 2014년 말에 1000조원, 지난해 말에 1200조원을 돌파했다.

위기를 느낀 정부가 뒤늦게 고삐를 조였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다. 은행의 대출을 옥죄자 상대적으로 고금리인 비은행권 대출이 느는 ‘풍선효과’가 나타났다. 정부는 최근 여신심사 가이드라인을 적용하는 등 규제를 확대하고 있지만 아직 효과는 미미하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현재 추세가 유지됐을 때 내년 말에 가계부채 1500조원 시대가 열린다.

‘숫자놀음 경제’가 문제

전문가들은 가계부채의 급등 원인으로 ‘숫자놀음 경제’ ‘근시안 정책’을 지목한다. 불황 속에서 당장 손쉽게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건설·부동산 분야를 외면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어느 정부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경기 부양’이라는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특히 박근혜정부는 어느 정권보다 적극적으로 부동산 경기부양에 매달렸다. 최근 1년간 주택부문 투자 평균 증가율은 전체 건설투자 증가율의 배에 가깝다.

부동산 경기가 급등해도 가계소득이 꾸준히 느는 등 가계의 기초체력이 튼튼하면 ‘파국’은 오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 가계의 소득 성장률은 형편없다. 기업의 이익을 나타내는 ‘영업잉여’와 근로자의 임금을 보여주는 ‘피용자보수’ 추이는 2000년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차이가 벌어졌다. 경제가 성장해도 그 과실은 기업과 국가에만 돌아갔다.

가계가 버는 돈은 적은데 부동산 가격이 치솟으니 빚을 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빚이 가계를 옭아매고 있다.

글=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 이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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