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를 해서 비닐봉투 생산기계를 도입한 우리는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장애인이 아닌 기계를 잘 다루는 기술자도 필요해 비장애인도 4명이나 채용했다. 하지만 최대한 장애인들이 공정에 참여하도록 배치했다.
지금까지 전자부품 조립을 받아다 납품하면 개당 수수료를 받는 것이었는데 이젠 생산을 직접 하는 것이니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든 셈이었다. 우리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제품다운 비닐봉투를 만들어 시장으로 갖고 나갔다.
제품을 트럭에 싣고 나갔던 홍성규씨가 한숨을 쉬며 돌아왔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했다. 우리가 만든 인쇄 비닐봉투 제작원가가 시장에서 890원인데, 다른 제품은 750원에 팔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손작업을 해 인건비가 많이 드는데 다른 곳은 모두 자동으로 생산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원생들을 놀리고 자동화로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홍 과장, 우리가 힘들어도 정체성을 잃으면 안 되네. 우리의 목적은 돈 버는 것이 아니고 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라네. 경쟁이 힘들어도 이 길을 갈 수밖에 없어요.”
결국 우리는 제품을 시장에 파는 것을 포기하고 주문을 받아 납품하는 일을 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신문사에서 첫 주문이 들어왔다. 비가 올 때 신문을 배달하면 젖기 때문에 신문을 넣을 길쭉한 비닐봉투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기뻤던 나는 정성을 다해 만들었고 이후 조금씩 주문이 늘기 시작했다.
비닐봉투 제작 작업은 시간이 갈수록 기술이 향상돼 인쇄도 선명하고 봉투의 질도 좋아져 소비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우리는 신이 나서 시장을 누비며 주문을 받았다. 하루는 직원들과 시장에 나갔다 점심시간이 돼 식사를 하고 오라고 했다. 내가 휠체어를 타고 식당에 가면 직원들이 번거로워 식사를 편하게 못하니 난 차 안에서 찹쌀떡을 먹겠다고 했다.
겨울이라 차 안에 히터를 켜고 내가 앉은 자리에 열선을 설치했는데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났다. 그런데 직원들이 돌아오더니 놀라서 황급히 나를 차에서 들어냈다. 열선이 과열돼 내 엉덩이를 태워 화상을 입혔는데도 감각이 없던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앉아 있었던 것이다. 바로 병원에 실려가 치료를 받았고 2주간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내 입에선 감사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중추신경 마비로 목 아래는 감각이 거의 없는데도 이렇게 사업을 하게 하시고 많은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업은 잘되는 것 같아도 결산을 하면 적자였다. 우리는 운영을 주먹구구식으로 한 데다 인건비가 많이 드는 게 문제였다. 경제학 박사로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UN ESCAP) 사무총장으로 근무하던 매형이 한국에 나왔다가 내게 회사 장부를 가져오라고 했다. 계속 적자라니 경영을 진단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매형은 이렇게 적자폭이 크면 회사가 곧 문 닫게 된다며 지출을 줄이라고 했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받는 적은 월급을 줄일 수는 없다고 하자 그러면 회사를 법인으로 만들어 정부의 지원을 좀 받아볼 것을 권했다.
이렇게 공동체생활을 하며 사업하는 가운데 가끔씩 우리를 찾아와 격려해주고 쌀과 부식 등 선물을 한아름 가져다주시는 귀한 목사님이 계셨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이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 역경의 열매 [기사 모두보기]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
[역경의 열매] 정덕환 <11> 비닐봉투 사업, 일은 많은데 결산하면 ‘적자’
시설 자동화 안해 손작업 많아… 장애인 원생 인건비 늘어난 때문
Ŭ! ̳?
Ϻ IJ о
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