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죄지은 貧者 구제하는 ‘장발장은행’ 아시나요

만삭의 아내는 밤에 갑자기 진통을 호소했다. 당시 무면허 상태였지만 남편 김모(34)씨는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김씨는 병원 쪽으로 차를 몰다 급한 마음에 빨간불 신호를 지나쳐 경찰에 적발됐다. 도로교통법 위반 등으로 벌금 200만원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회사의 인력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상태였다. 정부의 긴급생계비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었지만 출산 관련 비용을 내느라 돈은 바닥났다. 한 달 안에 벌금을 완납하지 않으면 구치소로 끌려갈 형편이었다. 지난 7월 ‘장발장은행’의 문을 두드린 김씨는 6개월 거치 후 10개월 분납 조건으로 200만원을 대출받았다. 김씨가 벌금을 내지 못해 구치소로 가면 가족을 돌볼 사람이 없다는 점이 고려됐다.

장모(36·여)씨는 3년 전 지인의 소개로 강원도 정선의 한 다방에서 일했다. 배달만 하는 조건으로 시작했지만 다방 업주는 선불금 300만원을 미끼로 장씨에게 성매매를 요구했다. 겁먹은 장씨가 일을 그만두자 업주는 돈을 갚지 않는다며 사기 혐의로 고소했고, 법원은 장씨에게 벌금 100만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판사는 벌금을 내지 않으면 하루에 10만원씩 환산해 노역장에 유치한다고 했다. 장씨는 장발장은행 대출신청서에 “누군가에겐 100만원이 적은 돈이겠지만 저에겐 너무나도 큰 돈”이라고 썼다.

장발장은행(2월 25일 설립)이 지난 3월 초 공식 업무를 시작한 지 2일로 꼭 7개월이 됐다. 벌금형을 선고받고도 낼 돈이 없어 노역으로 대신해야 하는 이들에게 무이자·무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곳이다. 1일 기준 245명에게 4억7225만원을 빌려줬다.

◇가난한 자들을 노역에서 구제하는 가난한 은행=장발장은행은 벌금을 못 낸다고 무작정 빌려주는 건 아니다.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7인으로 구성된 대출심사위원회가 신청서를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신청자 대비 대출 비중은 15%가량이다. 소년소녀가장이나 미성년자, 기초수급권자와 차상위계층은 우선 심사 대상이다. 음주운전·성범죄·대포통장 관련자는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벌금형은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는 대신 돈으로 처벌을 대신하는 제도지만 경제적 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에겐 법의 선처가 무의미하다. 현행 형법은 벌금을 30일 내에 완납하지 않으면 최대 3년간 노역장에 유치토록 하는 이중적 모습을 띠고 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벌과금(벌금과 과료 등을 포함)을 내지 못해 노역장에 유치된 이들은 4만2871명에 달한다. 돈이 없어 ‘몸으로 형벌을 때우는’ 사람들이다. 올해는 5만명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장발장은행은 당초 벌금형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2013년 출범한 ‘43199위원회’가 발전된 형태다. 43199는 2009년 노역장 유치건수(4만3199건)를 의미한다. 제도적 개선과 함께 당장 벌금을 내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은행제도를 응용했다. 장발장은행 운영진으로 참여하는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1일 “가난한 사람들이 돈이 없어 교도소를 가는 건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고통”이라며 “죄질이 나쁘거나 위험한 이들도 아닌데 형사처벌하고 벌금을 내지 못하면 교도소에 가두는 현실을 줄여보자는 취지에서 무이자·무담보 대출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장발장은행이란 이름은 서해성 소설가가 붙였다. 벌금 낼 돈이 없어 구치소를 전전하는 이들의 모습이 빵 한 조각을 훔치다 19년이나 감옥살이를 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과 비슷하다는 이유에서다. 이자수익에 연연하지 않는 은행, 늘 재원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노역장 유치의 위기에 처한 이들을 돕는다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은행이다. 그래서 장발장은행에 몸담은 이들은 ‘사라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은행’이라고 입을 모은다.

◇대출금 상환이 시작됐다=그동안 개인, 단체 명의로 들어온 성금은 총 4억3814만원가량이다. 교회와 성당에서도 꾸준히 성금이 들어온다. 재원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대출금 상환이 시작된 점은 고무적이다. 현재 전액 상환자 6명을 포함해 90명이 대출금을 일부 상환하고 있다. 6개월 거치기간이 지난 후 첫 달 상환액은 1일 기준 3659만원이다. 나머지 부족분은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운영하는 명례방 협동조합에서 2000만원을 빌려 충당하고 있다. 오 사무국장은 “대출을 해줘도 안 갚을 거란 예측이 많았지만 어려울 때 손잡으면 그 온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재원이 더 있으면 좋겠지만 돈이 돌면 대출은 500명, 1000명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대출심사위원인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출자 수에 비해서는 상환 규모가 미미하지만 국가가 돌보지 않은 이들이 은행을 통해 재기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 긍정적”이라며 “범죄를 저질렀다는 부분을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에서 낙오시켜선 안 되는데 국가가 미흡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출심사위원인 최정학 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는 “심사하면서 우리 사회에 어려운 사람이 정말 많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다”며 “경미한 범죄에 벌금 200만원을 선고하는 것과 기업범죄에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하는 건 큰 차이가 있는 만큼 근본적으로 벌금선고를 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힘 실리는 벌금형 제도개선=현재 국회에는 벌금형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법안이 발의돼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홍종학 의원은 지난 6월 벌금형에 집행유예를 도입하고 분할납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형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현행 형법 제 62조 1항은 3년 이하 징역 또는 금고형에 대해 집행유예를 적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새누리당 이한성 의원이나 새정치민주연합 김영록 의원은 집행유예 대상 범위를 벌금 500만원 이하로 제한하는 법안을 발의하는 등 온도차는 있지만 집행유예 요건을 완화하자는 데는 공감대가 있다.

경제력에 따라 벌금을 차등 부과하는 일수벌금제 도입안도 발의됐다. 이에 대해 지난 7월 열린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 참석한 김주현 법무부 차관은 “벌금형에도 집행유예를 도입하려는 취지를 이해한다”며 “고액벌금까지 집행유예를 인정하면 형평성 시비나 국민들의 법 감정에 반할 수 있어 500만원을 상한선으로 하는 게 타당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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