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2) 헤론, 그는 누구였나

Է:2015-09-0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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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에게 따뜻했지만 엄격한 도덕주의자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2) 헤론, 그는 누구였나
헤론 선교사는 따뜻하고 우정이 넘치는 형 같은 사람이었지만 보수적인 엄격주의를 지켰다. 사진은 초기에 내한한 8인의 선교사들로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알렌 언더우드 헤론 스크랜턴 마페트 게일 올링거 아펜젤러. 옥성득 교수 제공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2) 헤론, 그는 누구였나
한국에서 활동했던 초기 선교사들은 대개 20대 중반에 파송되었다. 헤론은 내한 당시 29세로 가장 늦은 편에 속했다. 미국 북감리회 소속 올링거(1888∼1893년 활동) 선교사만 중국에서 14년간 활동한 중진으로 전임되었다.



따뜻하고 우정 넘치는 형 같은 사람

초기 선교사들의 외형상 특징을 살펴보자. 얼굴을 보면 머리카락은 짧고 단정했으며 대신 콧수염이나 구레나룻을 많이 길렀다. 아펜젤러와 마페트만 수염이 없었다. 키는 언더우드가 작았고 헤론, 존스, 게일, 아펜젤러 순으로 중간키였으며, 스크랜턴, 마페트, 알렌은 장신이었다. 동료 선교사였던 기퍼드가 묘사한 헤론의 외모는 미남형 얼굴에 이마가 높고, 긴 눈썹에 감수성이 강한 낯빛, 매서우면서 순진한 눈매, 수북한 콧수염, 농담을 할 때 떨리는 윗입술을 가졌으며, 전체 인상은 위엄과 품위가 있고 깔끔하고 성실한 모습이었다(표 참조).

표는 여러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초기 남자 선교사들의 성격과 성향을 필자가 나름대로 분석한 것이다. 선교사도 인간이다. 개척 선교지에서는 갈등과 논쟁이 많기 때문에 여러 감정을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이들을 이해하려면 당시 정치 상황이나 선교 신학과 방법뿐만 아니라 각자의 성격, 성향, 인간관계 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헤론은 동료들에게 따뜻하고 우정이 넘치는 형 같은 사람이었지만, 보수적인 엄격한 도덕주의자였다. 술과 담배를 일체 하지 않았고 파티를 싫어했다. 커피보다 진한 것은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1888년 가을에 새로 온 파워 의사가 술을 마시고 저녁에 여자들과 노는 것을 혐오했으며, 그의 사임을 당연시했다.

헤론은 말이 적었다. 또한 알렌이나 언더우드와 달리 뉴욕 선교부에 편지를 별로 보내지 않았고, 자신의 입장을 굳이 변호하거나 옹호하지 않았다. 다만 테네시에 있는 부모에게는 많은 편지를 보낸 효자였다. 그는 인간관계에서 호불호가 분명하여 친한 사이라도 잘못한 점은 직선적으로 지적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많은 개척기 당시 성격이 날카로운 알렌, 저돌적인 언더우드, 과묵한 헤론 세 사람은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다.



최고 명의였던 헤론

헤론은 의사로서는 최고 수준의 명의였다. 알렌에 비해 월등한 의술을 가졌기 때문에 1887년 제중원 원장 겸 고종의 주치의가 됐고 외국인들을 진료하면서 왕실이나 공사관들 모두가 만족했다. 다만 외국인들에 대한 진료가 증가하면서 제중원에서 한국인 환자들을 돌보는 시간이 줄었고 따라서 한국어 습득이 지체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헤론은 전도열이 강했고 전도를 위해 한국어도 어느 정도 익혔기 때문에, 제중원에서는 치료만 했지만 정동 사택에서는 점차 방문자들에게 전도하고 성경을 가르쳤다. 특히 죽기 직전 병상에서 그는 한국인 하인들을 불러 복음의 기본 진리를 전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일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반면 알렌 의사는 인간적으로는 차갑고 날카롭고 정이 가지 않는 사람이지만, 정세 판단이 빨랐고 미국 사업가와 한국 양반 고위직, 왕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업적 거래에 능했다. 의사로서는 기술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전도열은 없었고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말이 서툴렀고 그래서 한국어로 전도한 적도 없었다.

헤론 의사가 한국 선교에 공헌한 점은 여덟 가지 정도로 평가할 수 있겠다. 첫째, 제중원의 두 번째 원장(1885∼1886)으로서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개신교 선교 사업의 기초를 놓았다. 둘째, 구리개 (을지로의 옛 지명) 제중원의 2대 원장 겸 고종의 주치의로서 제중원 진료를 본 궤도에 올리고 근대 의학 교육을 시작했다. 셋째, 의료 사업을 통해 넓은 의미의 선교, 곧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선교를 실천했다. 넷째,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가 조직될 때 번역위원으로 성서번역에 참여했다. 다섯째, 1889년 10월 선교회공회의가 조직될 때 회장으로 수고했다. 여섯째, 1890년 6월 대한성교서회(大韓聖敎書會, 대한기독교서회 전신)를 조직하고 전도책자 번역과 출판에 기여했다. 일곱째, 정동 사택에서 한국인들을 전도했다. 마지막으로 1890년 그의 죽음을 계기로 양화진에 외국인과 선교사들을 위한 묘지가 마련되었다. 그의 시신조차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5년의 짧은 선교사 생활이었지만 헤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과 성경을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고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섬기는 종으로 살았다.

옥성득 교수(美 UC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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