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업계 중견기업 김모(45) 부장은 집에서 저녁을 먹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거실에 앉아 9시 뉴스를 보는 건 일요일과 휴가 때 뿐이다. 그의 회사는 업무량에 비해 만성적인 인력 부족을 겪고 있다. 주5일 근무는커녕 지난주에는 밤 11시 전에 퇴근한 날이 없다.
인력에 비해 과중한 업무, 상사의 눈치, 연장근로를 해야 생계비가 확보되는 임금 수준 등 장시간 근로의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리나라 노동시장 전반에는 ‘과로 문화’가 뿌리박혀 있다. 오죽하면 대선 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을까.
그동안 근로시간을 줄이려는 여러 정책이 나왔지만 잘 먹히지 않았다. 이번에는 청년고용을 위한 노동개혁 차원에서 이슈로 떠올랐다. 야당과 노동계는 “임금피크제보다 근로시간 단축이 청년고용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고용노동부도 ‘일자리 나누기’를 위한 근로시간 단축안을 내놨다. 과연 한국인은 고질적인 ‘과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저녁 없는 삶=자동차 부품 업체에서 3년째 근무 중인 김모(25·여)씨는 퇴근시간만 되면 눈치를 본다. 이사부터 팀장까지 상사들은 오전 8시∼오후 6시 업무시간이 끝난 뒤에도 ‘당연히’ 회사에 남아 있다. 공정이 종료되는 오후 9시가 넘어야 일어서는 상사들 때문에 야근은 일상이 됐다. 김씨 회사는 야근수당을 따로 주지 않는데도 직원의 절반 이상이 업무시간을 넘겨 일한다.
생산설비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가동되는 교대근무제는 장시간 근로의 원인이다. 완성차 업계에서는 ‘10/10’으로 불리는, 하루 8시간 노동에 2시간 고정 잔업이 부가된 형태의 2교대가 고착돼 왔다. 휴일근로도 거의 매주 이뤄진다. 2011년 현대자동차 기술직 노동자는 2678시간을 근무했다. 현대차는 2012년 노사 합의를 거쳐 이를 주간연속 2교대제로 바꾸기로 했다. 내년 3월까지 8시간 노동을 하며 서로 교대하는 ‘8/8’ 형태를 도입한다.
대학병원 간호사 박모(26)씨는 3교대로 쉬는 시간 없이 일한다. 3교대는 ‘낮 근무’(오전 7시∼오후 3시) ‘저녁 근무’(오후 2∼11시) ‘밤 근무’(오후 10시∼오전 8시)로 구성되지만 실제 근무시간은 1시간∼1시간30분 더 길게 이어진다. 환자가 몰리는 시간에는 ‘칼퇴근’을 할 수 없어서다. 박씨는 차트 관리, 의사와 환자 간 소통, 관장·투약 등 잡다한 업무부터 응급환자 관리에까지 투입된다. 업무 중 휴식시간이 보장되지 않고 식사를 거르는 게 일상이다.
◇출근은 있지만 퇴근은 없다=자동차 부품 업체에서 일하는 김모(33)씨는 자정이 가까워 퇴근하는 일이 잦다. 오전 8시 출근해 밤늦게까지 일하지만 초과근로수당은 받지 못한다. 주말에 일해도 휴일수당은 없다. 연장근로·야근수당 등을 급여에 포함해 임금으로 정한 ‘포괄임금제’로 근로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기업은 인건비를 줄이려고 추가로 야근·휴일근로 수당을 줄 필요가 없는 포괄임금제를 채택한다. 이렇게 근로계약을 하면 출근시간은 있어도 퇴근시간은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주어진 일이 끝나는 때가 퇴근시간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0년 직장인 1만158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2%가 포괄임금제였다.
에어컨 사용이 많은 여름철엔 가전제품 수리 서비스를 하는 노동자의 근로시간도 대폭 늘어난다. 삼성전자서비스노조 오기형 총무위원은 “여름에는 밤 11시를 넘겨 근무하는 경우도 많다”며 “우리끼리는 ‘(자정을 넘겨) 오늘 퇴근했다’고 말하는 게 일상”이라고 했다. 또 “에어컨이나 냉장고가 자주 고장나는 6월에서 9월 초까지 하루 14∼15시간 일한다. 일하는 시간보다 그 강도가 더 문제”라고 덧붙였다. 보통 1시간에 1건 정도가 평균인데 성수기에는 15시간에 20건 정도 일이 들어와 업무 강도가 높아진다는 설명이다.
은행원 이모(27)씨는 오전 7시 출근해 오후 7시 퇴근할 때까지 12시간을 일한다. 정해진 근무시간은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인데 각종 결재, 회의 등을 하다보면 은행 영업시간 2시간 전 출근하고 영업을 마친 뒤 3시간을 추가로 일하는 수밖에 없다. 쉬는 시간은 식사시간 40분을 제외하고는 없다. 초과근무를 했다고 기록을 올리면 휴가가 나오지만 암묵적으로 올리지 않는 분위기다.
◇허점 많은 규제=서울 관악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 정모(65)씨는 24시간 맞교대로 일하고 있다. 1명이 아파트 3개동을 관리한다. 쓰레기 분리배출, 주차장·놀이터 청소 등을 하면서 주민들이 제기하는 각종 민원도 해결해야 한다.
정씨 같은 경비원은 ‘감시·단속 근로자’로 분류돼 근로시간 규제가 없다. 근로시간과 쉬는 시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비원이나 물품감시원 같은 직종이 여기에 해당된다. 휴식 및 식사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 정씨는 주당 72시간 일하며 160만원 정도를 받는다.
법제처는 지난 4일 감시·단속 근로자도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 사이에 근무할 때는 야간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놨다. 하지만 아파트 경비원들은 인건비가 올라 되레 일자리를 잃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인건비가 오르면 아파트 관리 업체가 경비원 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체 부장급 이상 관리자들도 근로시간 규제의 사각지대다. 관리·감독·기밀취급 업무는 근로기준법에서 근로시간 규제의 제외 대상으로 분류된다.
이렇게 갖가지 이유로 한국은 ‘세계 최장 시간 근로’란 타이틀을 갖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우리나라 근로자들은 1년에 평균 2163시간을 일했다. 34개 OECD 회원국 중 멕시코(2237시간)에 이어 2위다. OECD 평균(1725시간)보다 438시간이나 많다. 연간 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독일(1388시간)과는 천양지차다.
우리나라 법정 근로시간은 1989년 주 48시간에서 44시간으로 줄었고, 2011년부터 5인 이상 모든 사업장에 주 40시간제가 적용됐다. 하지만 제도와 현실은 따로 돌아가고 있다. 제도를 바꾸고 규제를 해도 장시간 근로라는 악습은 여전하다.
홍석호 기자 wi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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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본 노동개혁] 저녁 없는 삶… “집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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