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교회에서 보내주던 선교비가 끊기면서 우리는 바로 빚쟁이가 되었다. 임대한 학교건물 월세를 못주고 교사들 봉급도 밀렸다. 학생들에게 먹이던 점심 급식을 마련하기도 힘들었다.
일단 제일 먼저 타던 차를 팔아 두 달을 버텼지만 이젠 돈이 나올 곳도 없었다. 해결을 위해 기도는 했지만 한국에 아는 교회도, 사람도 별로 없는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여보. 우리 사명은 여기까지예요. 억지로 학교를 끌고 나가면 나갈수록 빚만 쌓이는 것이고 학교를 내놓고 한국으로 들어갑시다.”
내 말에 아내도 대꾸를 못했다. 집은 금방 나갔는데 학교는 맡을 후임자가 없었다. 하기야 매달 돈이 만만찮게 들어가는 학교를 누가 맡을 것인가. 잘 알고 지내던 선교사님이나 외국 선교단체에까지 부탁을 했지만 모두 난색을 표했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 이유였다.
진퇴양난이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공부하던 어린이들에게 이제 더 이상 학교에 오지 말라고 하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짐정리를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표까지 끊었지만 차마 어린이들에게 폐교 소식을 알리지 못했다.
한국행 3일 전이었다. 나에게 ‘브라더’를 외치며 밝게 웃는 교사들과 아이들을 뒤로 하고 나만 도망치는 것 같아 너무나 괴로웠다. 하나님께 기도로 다시 매달렸다. 마음 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천록. 네 믿음이 고작 이 정도냐. 학교운영 힘들다고 보따리 싸면 그 정신으로 한국에서 목회 잘 할 수 있겠니. 선교사는 어차피 고난과 역경의 길인데 버틸 때까지 버텨보아라.”
아내 역시 철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비행기표는 샀으니 일단 한국으로 들어와 교회를 찾아다니며 선교보고를 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간신히 그 달 운영비를 마련해 학교로 돈을 송금해 주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점심을 굶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학교설립 초기에 아이들이 결석을 많이 해 알아보니 굶어서 다리에 힘이 없어 못나온다고 했다. 너무 마음이 아파 이 때부터 점심급식을 조금씩이라도 하려는데 어린이들이 워낙 많으니 비용이 만만치 않아 힘들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주는 점심으로 하루를 버텼다.
나는 한국서 방글라데시 급식비 마련 음악회를 열어 보기로 했다. 나는 아내에게 피아노 연주를 하라고 했다. 이제 이야기 하지만 아내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미국유학까지 다녀와 대학강사를 하던 재원이었다. 하나님께 붙잡혀 선교사가 되고 모든 것이 시원찮은 나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아내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처갓집 식구들은 생병으로 앓아누웠었다. 아내는 “대학교수는 내가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지만 방글라데시 영혼사랑은 나 아니면 안 되기에 선교사의 길을 택한 것”이라고 말해 나를 감동시켰다.
“아니 여보. 내가 피아노를 손 놓은지 얼마나 되는데 이제 와서 모금 연주회를 하라고 해요.”
“음악회 티켓을 팔았는데 음악을 들려줘야 할 것 아니예요. 그냥 잘치는 찬송가만 치세요.”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1만원짜리 음악회 티켓을 강매하곤 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표를 팔고 숙소인 인천 선교관으로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었다.
음악회날, 아내의 피아노 연주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실려 있었다. 녹슬었던 실력이 되살아나면서 많은 참석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표를 판 가격에다 즉석 헌금까지 더해지면서 400만원이 들어왔다. 아이들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급식비였다. 나와 아내는 얼싸안고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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