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칼럼 > 시사풍향계

[시사풍향계-조세영] 한·일관계와 상위 목표

“감정적 인식보다 외교관계의 현실적 이익 찾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된다”

[시사풍향계-조세영] 한·일관계와 상위 목표 기사의 사진
뜬금없는 이야기이지만 일왕은 과연 한국을 방문할 수 있을까? 2014년 일본 내각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고 대답한 일본인은 겨우 31.5%로, 1978년 조사가 개시된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처럼 한·일 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 일왕의 방한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왕은 1992년 10월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한·일 관계 못지않게 냉각된 현재의 중·일 관계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의아할 정도다. 당시 중국은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인한 국제사회 제재 조치를 완화시키고 국제적 이미지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일본은 1990년 11월 서방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경제 제재를 해제했고, 중국은 국제사회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일본이 큰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런 배경에서 일왕의 중국 방문이 가능했던 것이다.

개인의 관계도 그렇지만 국가 간 관계에서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불만을 자제하고 협력하는 법이다. 현재 한·일 관계가 좀처럼 경색국면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절실함이 부족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한·일 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감정적 인식이 외교관계의 현실적 이익을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과거 한·일 관계에는 구체적이고 뚜렷한 현실적 이익이 존재했다. 냉전구도 하의 안보 협력과 일본으로부터의 경제 협력이었다. 그러나 냉전 종식과 한국의 경제성장으로 한·일 관계에 구조적 변화가 나타났다. 안보 협력과 경제 협력의 절실함이 약화된 반면 과거사 문제와 독도를 둘러싼 마찰이 점점 강하게 표출되기 시작했다.

국교 정상화 50년을 맞는 한·일 관계는 이러한 구조적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감정적 인식에 쉽사리 압도되지 않는 현실적 이익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한·일 관계는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우선 한·일 관계의 상위 목표가 무엇인지 명확히 하고 그곳에서부터 바람직한 관계를 연역해내야 한다. 한국 외교의 전체적인 청사진 속에서 한·일 관계의 정확한 위치 규정을 하고 절실한 필요성의 존재 여부를 판별하는 것이다. 양국 관계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으며 더 높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돼야 한다.

한국 외교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 실현이다. 그리고 통일을 위한 가장 중요한 외교적 조건은 주변 국가의 신뢰와 협력이다. 2004년 10월 주한 독일대사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독일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통화했다’고 밝혔다. 남북통일의 국면에서 일본과의 협력은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통일을 위한 협력은 앞으로 한·일 관계를 지탱해줄 새로운 기둥이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상위 목표로서 동아시아 지역 질서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급속한 대두로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이 크게 변화하는 가운데 한국의 전략적 이익은 이 지역에서 조화롭고 안정된 질서가 형성되도록 하는 데 있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는 미·중 양국이 주도하는 게 아니라 역내 국가들의 정당한 이해(利害)가 반영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상위 목표 아래 한국과 일본이 새롭게 협력할 공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감정적인 인식에 휩쓸리지 않고 이해득실의 냉정한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외교의 기본이지만 한국 외교는 이에 익숙하지 않다. 한·일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비록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축하하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대신 한·일 관계의 상위 목표와 실리적인 협력 가능성을 차분히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X 페이스북 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