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녹이는 성탄… 이 버스는 사랑을 태우고 달립니다

마주앉은 엄마와 딸은 30여분 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듯했다. 딸(17)이 어색해하는 사이 성우가 미리 녹음한 엄마의 사연이 차내 방송으로 흘러나왔다.

“엄마 아빠 역할을 혼자서 하려다 보니 나를 정말 필요로 했던 우리 딸의 유년시절을 외면하고 살아온 건 아닌지…. 엄마로서 미안하다. 그럼에도 엄마만 보고 착하게 자라줘서 고마워.”

엄마는 딸이 중학생일 때 담임교사와 몰래 면담한 사실도 털어놨다. “일탈을 원하는 감정과 엄마를 실망시켜선 안 된다는 감정이 뒤섞여 네가 무척 우울해한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어. 그날 선생님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펑펑 울었단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를 듣던 딸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너무 많이 울어 다른 말을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난 20일 엄마 김모(45)씨와 딸은 서울시 ‘속마음 버스’에서 서로의 속내를 내보였다. 서울시는 지난 3월부터 이 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가까운 이들과 평소 못했던 말을 털어놓는 공간, 오해와 갈등을 풀어버릴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김씨는 딸이 두 살 때 이혼했다. 행여 다치기라도 할까봐 애지중지 키웠다. 퇴근만 하면 졸졸 따라다니며 종알대던 딸은 어느새 “내 생각을 남이 아는 게 싫다”며 입을 꾹 다무는 고등학생이 돼버렸다. ‘딸의 사춘기를 외면하고 살아온 게 아닐까’란 마음에 ‘버스 탑승’을 신청했다. 김씨는 24일 “그동안 어떻게 하면 대화할 수 있을지 답답했는데 그 버스에 탄 뒤로 딸도 얘기를 많이 한다”며 “오늘은 기말고사 끝난 딸과 친구들을 불러 함께 크리스마스파티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뭐…. 뭐든지 가능한 크리스마스니까.’ 노총각 한상기(45)씨는 지난 19일 처음 용기를 내서 어머니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저랑 서울구경 한번 하시죠.” 그러곤 이튿날 둘이 속마음 버스에 올랐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버스를 타려 했는데 예약이 꽉 차 있었다. 어색함은 잠시였다. 창밖으로 펼쳐진 서울 야경을 보며 한씨는 말문을 열었다. 한번도 속시원히 꺼낸 적 없던 자신의 결혼 얘기였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40대 중반이 되도록 결혼은 늘 먼 얘기였다. 어머니는 “네 결혼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늘 미안해했던 터다.

아들이 결혼 결심을 털어놓자 어머니는 “항상 더 많이 신부를 아껴주고 사랑해라. 그게 전부다”라고 했다. 남편 대신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5남매를 키우며 안 해본 일이 없다. 한씨는 “어머니는 ‘삶의 지혜’ 그 자체”라고 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지만 사람과의 관계, 삶을 대하는 태도 등을 모두 어머니에게 배웠다고 한다. 모자는 노총각 아들의 결혼 계획을 ‘공식화’하며 손을 꼭 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서울시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속마음 버스(사진)를 타려는 신청이 쇄도했다고 밝혔다. 딸을 너무 엄하게 다그친 게 아닌지 돌아보고픈 엄마, 평생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해준 무뚝뚝한 남편, 병마와 싸우는 친구에게 용기를 주려는 사람 등 사연도 제각각이다.

서울시 ‘마음치유 프로젝트’의 일환인 속마음 버스는 오후 6시20분과 8시20분 하루 두 차례 운영된다. 버스 1대에 두 팀만 탄다. 여의도에서 출발해 마포대교와 자유로를 거쳐 다시 여의도로 돌아오는 1시간50분 코스다. 3월 31일 첫 운행 후 1043명이 이 버스에서 속마음을 꺼냈다.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에는 취업난에 지친 남자친구를 위로하려는 여자친구가 이 버스를 타고 ‘깜짝 이벤트’를 했다. 버스는 사랑과 화해, 위로와 격려를 싣고 달린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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