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네팔 카트만두 사라티 파트샬라 학교에서 특별한 졸업식이 열렸다. 주인공은 아홉살까지 부족어만 사용해 네팔 공용어조차 몰랐던 소년 ‘라주’였다.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지내던 그는 2015년 대지진으로 온 나라가 큰 혼란에 빠졌던 무렵 차기현(52) 선교사의 고아원에 맡겨졌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라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의 첫 졸업생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한때 생존을 걱정해야 했던 소년이 이제 대학에 어느 과를 갈지 행복한 고민을 하는 청년으로 성장한 것이다.
지병 치료차 한국을 잠시 방문한 차 선교사는 최근 국민일보를 만나 “먼지 가득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라주의 졸업과 같은 ‘열매’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총회의 파송을 받은 그의 네팔 사역은 한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됐다. 본래 그의 사역지는 호주였다. 멜버른에서 안정적인 목회 이민을 준비하던 중, 영주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를 만났다. 네팔 출신 이민자였던 변호사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목사님 같은 분이 호주보다 네팔에 오시면 더 귀하고 보람된 일을 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땅이었지만, 차 선교사는 아내와 함께 이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보통 선교지를 정하기 전 두세 번 답사를 가는데, 저희는 사전 답사 한 번 없이 곧바로 짐을 싸서 갔다”며 “2011년, 그렇게 네팔 생활이 시작됐다”고 회상했다.
2015년 4월 네팔을 덮친 대지진은 그의 사역에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지진 당시 사역비가 떨어져 후원을 요청하러 홀로 한국에 나와 있었다. 뉴스 속보로 네팔의 참상을 접한 그는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 애를 태웠다. 그는 “수십 통을 전화한 끝에 겨우 가족과 통화가 됐다”며 “이후 저의 상황이 알려지면서 한국 교회와 교단에서 구호 헌금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후원금은 구호 물품 뿐만 아니라, 무너진 땅에 교회를 세우는 종잣돈이 됐다.

지진은 수많은 고아를 남겼다. 차 선교사는 이 아이들을 위한 보금자리로 고아원을 시작했고,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2017년 폐교 직전의 학교를 인수했다. 학생 수가 17명에 불과했던 학교는 현재 310명이 다니는 배움터로 성장했다. 특히 올해 처음으로 10학년 과정을 인가받으면서, 초등부터 고등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완전한 형태의 학교로 자리 잡게 됐다. 그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장학금을 주다 보니 학교는 늘 적자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무명의 후원자들을 통해 채워주시는 기적을 경험한다”고 말했다.
네팔은 개인의 종교는 인정하지만, 타인에게 개종을 권유하는 행위는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는 나라다. 직접적인 전도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의 사역은 ‘치유’를 통해 확장됐다. 그는 “네팔은 다신교 사회라 영적 세계에 열려있고, 그래서인지 원인 모를 질병이나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며 “이들이 교회를 찾아와 기도하며 치유되는 일들이 입소문을 타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파됐다”고 설명했다. 차 선교사는 현재 40여개의 현지 교회와 협력하고 있고, 이 교회들은 모두 네팔인 목회자가 책임지고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차 선교사는 다음 목표로 ‘신학교 설립’을 꼽았다. 그는 “부흥이 뜨거운 만큼 신학적 기반이 약해 이단에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며 “체계적인 교육으로 건강한 현지 목회자들을 양성해 네팔 교회의 미래를 준비하고 싶다”고 밝혔다. 14년간 낯선 땅에서 사역을 이어온 원동력을 묻자, 그는 “사역을 하다 보면 이제 끝났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며 “하지만 주님께서 끝이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결코 끝이 아니다. 그 믿음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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