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우 연출가는 지난 2013년 9월 국립극단에서 기획한 ‘아리스토파네스 3부작’의 일환으로 ‘구름’을 준비 중이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희극의 거장으로 알려진 극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정치가들을 풍자해 웃음을 유발하면서 정치와 사회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3부작인 ‘개구리’(9월 3~15일), ‘구름’(9월 24일~10월 5일), ‘새’(10월 22일~11월 3일)를 현대 한국에서 올리는 만큼 각각의 창작자들은 한국 상황에 대한 풍자를 담아 각색했다.
그런데, 첫 번째 작품인 ‘개구리’가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 부녀를 풍자했다는 이유로 보수 진영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당시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개구리’를 계기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조직적으로 지원 배제를 하도록 지시함으로써 블랙리스트 사태의 본격적 출발점이 됐다는 것이 2017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 백서’(이하 블랙리스트 백서)에 담겨 있다.
‘개구리’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인 ‘구름’에는 성추행 파문을 빚고 경질된 박근혜 정부 청와대 대변인 윤창중 씨를 비롯해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 등 야권 정치인들의 정책을 풍자하는 대목도 포함됐다. 남 연출가는 공연을 앞두고 당시 국립극단 C사무국장으로부터 빨간 줄이 그어진 대본이 담긴 봉투를 전달받았다. 특정 대사를 삭제하거나 수정하라는 취지였다.
블랙리스트 백서에 따르면 2013년 9월 문화체육관광부 공연전통예술과장은 당시 청와대에 ‘국립극단 기획공연 <개구리> 관련 현안 보고’라는 제목의 문서를 청와대에 보고했다. 이 문서에는 국립극단 예술감독 조치사항으로 “연출가로 하여금 결말을 수정하도록 하고 과도한 정치적 풍자를 대폭 완화하도록 지도하는 등 문제의 소지를 최소화하도록 조치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 향후 조치계획으로 “향후 국립극단 작품에 ‘편향된 정치적 소재’는 배제토록 강력 조치한다. 아리스토파네스 시리즈 2차 작품 ‘구름’ 등 후속작품에 정치적 소재의 내용은 배제토록 조치한다”고 되어 있었다.
남 연출가는 2022년 10월 “문체부에서 대본을 사전 검열한 후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통해 내용을 수정하라고 지시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국가와 국립극단을 상대로 1억 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남 연출가가 사건 발생으로부터 9년이나 지나 소송을 제기한 것은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가 백서를 만들 때까지 검열 행위의 주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국립극단이 2020년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를 위해 ‘블랙리스트 사례집’ 발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C사무국장이 S예술감독으로부터 빨간 줄이 그어진 대본을 받아 전달한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하면서 행위 주체가 드러나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지난해 10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남 연출가의 승소 판단을 내리고 국가와 국립극단이 공동으로 2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국가배상소송에서 국가를 대리하는 법무부와 국립극단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국립극단의 경우 문체부 국장이 당연직 이사로 포함된 이사회에서 손해배상 소멸시효에 대해 다툼의 소지가 있는 만큼 항소하지 않으면 배임이 될 수 있다고 권고한 데 따른 것이다.
국가배상소송의 경우 사건이 있었던 날로부터 5년, 국민이 손해나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내에 소송을 제기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국립극단 이사회와 법무부는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조사를 기준으로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봤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국립극단의 C사무국장이 빨간 줄 그어진 대본을 인정하고 시인한 2020년 4월에야 남 연출가가 문체부 공무원과 S예술감독의 검열 행위를 확실히 인지한 만큼 이때를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정해야 한다며 지난 4월 1심 판결을 인용했다.
1심과 2심 모두 남 연출가가 승소한 뒤 국립극단은 항소심 판결에 승복했다. 대법원에 상고해도 승소의 가능성이 없다는 법률 자문을 받은 후 예술감독 직권으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법무부는 항소심 판결에 불복해 최근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와 관련해 국립극단 관계자는 “만약 대법원에서 법무부가 승소하더라도, 국립극단은 항소심 판결에 승복한 만큼 남인우 연출가에게 손해배상을 할 예정”이라면서 “남 연출가가 소송 과정에서 많이 힘들어했던 것을 알고 있다”며 재판에 대한 유감을 표했다.
소송을 시작한 이후 남 연출가는 마음고생을 적지 않게 했다. 특히 법원에서 조정을 권유받았을 때 합의하기로 했던 법무부와 국립극단이 얼마 뒤 조정을 거부하고 재판을 받겠다고 나선 것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남 연출가는 “법무부와 국립극단이 공소 시효가 만료됐으며 배상액이 크다는 이유로 합의를 부인했다. 당시 정권이 교체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때 어머니상을 치르면서 받은 조의금을 가지고 변호사를 찾아갔다. 이후 1심에서 이겼지만, 국립극단이 항소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었다”면서도 “이번 소송을 시작한 취지는 검열이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알리는 목적과 함께 국립극단 등 예술기관이 독립성을 가지지 못한 채 정치 권력과 문체부 관료주의에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검열이 이런 국가 시스템 속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판결문으로 남김으로써 국립극단 등 예술단체가 독립성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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