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에서 에이즈 고아 13명 25년 키운 한국인 부부

“누군가는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난과 에이즈로 대표되는 감염병 문제가 뿌리 깊은 남부 아프리카. 이곳에서 한 한국인 부부가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자신들의 공간을 내어준 지 25년이 흘렀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양딸과 부부가 서울에서 해후했다. 29일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세 사람을 만났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총회장 정태진 목사) 소속의 노록수(66) 선교사와 아내 김은혜(64) 선교사는 1994년 어린 두 자녀와 함께 방글라데시로 향했다. 교단 선교부의 지시로 떠난 세계 최빈국에서의 1년 남짓한 사역이 채 몸에 익기도 전에 교단은 새로운 선택지를 내밀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의 1호 선교사로 가달란 것이었다. ‘어딜 가도 방글라데시보다 더하겠는가’라는 생각으로 향한 남아공은 생각보다 발전해 있었다.

이전 사역지에서 이어진 관성 때문이었을까. 노 선교사는 언어 습득이 어느 정도 이뤄지자 가능한 열악한 곳을 탐색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인접한 왕국 레소토. 부부는 국경을 오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1999년 레소토 내란으로 국경이 막혔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레소토에 닿는 국경 마을 픽스버그(Ficksburg)에 정착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이라면 어디든 된다’는 마음으로 접경지역 사역을 이어가던 어느 날, 지역 병원 의사가 신문에 글을 냈다. 에이즈로 부모를 잃고 홀로 죽어가는 신생아 이야기였다. 신문을 들고 온 노 선교사는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 집 창고 비어 있잖아. 저 아이 데려오자.”

그렇게 생후 6주 된 마푸시를 만났다. 병원에선 울기만 하던 아이가 부부의 품에 안기자 곤히 잠들었다. “너무 작고 연약했어요. 아기 천사 같았죠.” 이미 고등학생이던 친자녀들도 입양을 반대하지 않았다. 소문은 금세 돌았다. ‘한국에서 온 선교사 부부가 에이즈 걸린 부모의 아이를 돌봐준다더라.’

한 번 문을 연 창고는 곧 ‘엔젤스 홈(Angel’s Home)’이 됐다. 에이즈에 걸린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버려진 아이들이 하나둘, 많을 땐 13명까지 모여 살았다. 지금은 친척이 찾아간 아이를 제외하고 12명이 노 선교사 부부를 엄마 아빠로 부르며 살고 있다.


25년. 그 안에서 아이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이라 부를 만하다. 노 선교사는 “4000만에 이르는 전 세계 HIV 감염자 중 절반 이상이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 집중돼 있다”고 설명한다.

부모에게서 수직 감염된 채 태어나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경험상 수직 감염 비율은 반반이에요. 옆에 있는 레베카도 감염 없이 건강하게 태어난 사례죠.”

2022년 한국에 들어와 경기도에서 원어민 영어 강사로 일하고 있는 레베카(29)씨는 같은 지붕 아래 병마와 싸우는 동생들을 돌보며 엔젤스 홈의 큰언니 역할을 했다. 십 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엔젤스 홈에 왔을 때 4살이었던 그는 “처음 엄마 아빠(노 선교사 부부)를 만났을 때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두 분 덕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다”고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말했다. 엔젤스 홈의 아이들은 양부모의 영향으로 한국에 관한 관심이 크다고.

아픈 아이 포함 13명을 양육하는 일은 전혀 쉽지 않았다. 김 선교사는 “초창기엔 국가 지원이 없었어요. 약값이 비싸서 병원에서 직접 사다 먹였죠. 열이 나면 밤새 가슴 졸였어요”라고 했다. 그러나 기적은 있었다. 의약품 지원이 시작됐고 아이 중 3명은 기적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았다.

엔젤스 홈에는 늘 예배와 찬송, 성경공부가 이어진다. 노 선교사는 “내 자녀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으로 키운다”며 “아이들이 우리 없이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13명 아이는 각자 개성 넘치는 청년·청소년으로 자랐다. 노 선교사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감정적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게 한 아이가 존”이라고 꼽았다. 존은 태어날 때부터 에이즈를 안고 태어났고 엄마는 아이를 맡기고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6살 무렵 정기 피검사에서 기적처럼 바이러스가 사라졌다. 그러나 감사도 잠시였다. 사춘기의 파도는 고스란히 엔젤스 홈을 덮쳤다. 존은 유독 속을 많이 썩였다. 경찰서에 가고 동네 어른들에게 혼나고 가출도 반복했다.

노 선교사는 당시를 떠올리며 웃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하나님께 돌아왔어요. 지금은 신학교 입학을 준비하고 있어요.”

존 이야기를 마친 노 선교사는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아이들이 건강한 것도 기쁘지만 제일 기쁜 건 그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집에서 늘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가르친 것도, 주일이면 꼭 교회에 가고 비싸더라도 기독교 사립학교에 보낸 것도 결국 ‘신앙’이 목적이었다.

“학교에서도 신앙적으로 영향받길 바랐죠. 교회에서도 물론이고. 한국 자녀를 키워도 믿음으로 크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런 환경을 이 외국 아이들에게 만들어주려고 했어요. 내가 낳은 아이들도 아닌데, 게다가 대부분 원가정이 깨져 있고 양부모와 피부색도 달라서 애들이 공허하고 고독했을 거예요. 그런데 애들이 믿음만 있으면 잘 살 수 있다고 확신했어요. 감사하게도 확신대로 아이들이 잘 자라줬습니다.”

김은혜 선교사는 “간혹 선교라는 게 크고 거창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저도 그랬다”며 “지금은 그냥 이 아이들이랑 같이 살아주는 게 가장 가치 있는 선교였음을 깨닫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늘 전해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제가 품은 아이들 각자가 예수의 사람 되는 것만큼 큰일이 없어요. 그 아이들이 또 하나님 일꾼이 되잖아요. 저는 늘 말해요. ‘너는 특별하다. 네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 그렇게 성경공부 하면서 꿈을 심어줘요.”

노 선교사는 마태복음 말씀을 떠올렸다.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이 세상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요. 선교사가 큰일만 쫓기보다 그 땅의 작은 필요라도 채워주고 평생 그곳에 살아주는 것, 저는 그게 진짜 선교라고 믿습니다.”

레베카씨는 지금 한국에서 원어민 교사로 일하며 번 돈 중 일부를 매달 부부에게 보낸다. 그는 “두 분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됐고 한국을 알게 됐다”며 “인도하심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에 하나님이 내게 예비하신 길을 온전히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노 선교사는 “12명의 아이 중 가장 자랑스러운 모델이 레베카”라며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했다. 김 선교사는 “엄마는 레베카가 오직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예수님의 좋은 증인으로 살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부부와 딸은 수줍게 서로의 등을 토닥였다.





글·사진=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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