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북부 에게해 연안에 있는 카발라는 사도 바울이 유럽 대륙에 처음 도착한 관문지로 개역 성경에서는 ‘네압볼리’로 명명된다. 지난 19일 오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여수노회 여천북시찰회 소속 성지순례팀과 이곳을 방문했다. 그리스선교&성지연구소(이사장 송병학 목사) 주최로 열린 성지순례는 ‘사도 바울과 초대교회’를 주제로 지난 12일부터 20일까지 튀르키예와 그리스를 방문하는 여정이었다.
바울이 유럽의 첫발 내디딘 네압볼리
네압볼리 항구에는 여러 배가 정박해 있었는데 석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는 풍경과 어우러져 한편의 그림이나 다름없었다. 네압볼리는 BC 5세기경 아테네에 조공을 바친 도시의 목록에 기록돼 있다. 로마 시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빌립보에 진을 쳤을 때 네압볼리에 전함을 정박시켰다. 비잔틴 시대에는 크리스투폴리스로 불렸고 마게도니아 지방의 주요 항구 도시였다. 아테나 파르테노스 여신의 신전 등 로마 시대의 유적과 그리스풍 마을이 많이 남아 있어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는 성령님의 음성을 받고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선교 방향을 바꾼 바울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상상했다.
순례팀은 연구소 연구원 김태연 목사와 함께 실제 바울이 처음 발을 디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진 ‘사도바울 도착 기념교회’에 들렀다. 항구 가까이에 있는 교회 앞에 대형 벽화가 설치돼 있었다.
화려한 모자이크 벽화는 두 장면을 형상화했는데 중앙에는 바울이 환상 중에 본, ‘마게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요청한 마게도니아인이 양손을 펼치고 있었다. 왼쪽에는 마게도니아인의 이야기를 듣는 바울, 오른쪽은 같은 의상의 바울이 성경책을 든 채 배에서 땅(네압볼리로 추정)으로 내딛는 모습이다. 이곳에서 바울의 유럽 선교가 시작된 유의미한 내용을 가리킨 대목이다. 벽화를 자세히 보면 바울의 발끝이 상처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든 선교 여정에 전도자의 역경과 고통이 동반됐음을 알리는 것이지 않을까.
김 목사는 “바울이 이 땅을 시작으로 유럽 등을 거쳐 한국에까지 복음이 전해진 것을 알 수 있다”며 “그러나 당시 바울은 현재 한국식으로 비유하면 ‘하나님이 경상도로 가려던 발걸음을 전라도로 바꾸게 하셨구나’ 정도로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그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자신의 길을 한발 한발 걸었을 뿐인데 나중에 보니 그 발걸음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빌립보에서 겪은 바울의 고난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행 16:11~12)
지난 20일 오전 순례팀은 바울의 여정을 따라 네압볼리에서 북서쪽으로 13㎞ 떨어진 빌립보를 가기 위해 이른 시각부터 채비를 차렸다. 빌립보는 에게해에서 내륙으로 16㎞ 들어가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있다. 바울이 드로아를 떠나 네압볼리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전도한 지역인 빌립보는 마게도니아의 첫째가는 도시였다.
입장료를 내고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자 다른 로마 유적처럼 야외 원형극장이 산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극장에서는 각종 공연이 열렸고 초대교회가 박해받던 시기에는 그리스도인 노예들이 맹수와 대결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순례팀은 극장을 지나 바울이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줌으로 그 주인에게 고소를 당해 갇힌 감옥에 들렸다. ‘바울의 감옥’이라는 문패 안으로 4.9㎡(1.5평) 남짓한 감옥을 보자 순례팀원들은 고개를 떨궜다. 기자도 그동안 수없이 성경에서 들었던,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현장을 보니 숙연해졌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라가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채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미하자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믿는 기적이 이어진다.(행 16:16~34)
바울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오게 된 빌립보에서 단지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쳐줬을 뿐인데 돌아온 건 심한 매질을 받으며 결국 감옥에 갇혔다. 그 상황에서 원망했을 법도 한데 바울은 불평 대신 찬양하며 감사했다.
감옥 옆에는 옛 도시의 대광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광장은 고대 로마의 도로망 가운데 하나인 ‘에그나티아 도로’ 바로 옆에 있으며 면적은 길이 91m, 폭이 46m 이상의 장방형으로 돼 있었다. 고대 로마의 도로망 가운데 하나인 에그나티아 가도는 BC 2세기경 로마가 마게도니아를 정복한 후 건설한 동서 간선 도로다. 이것은 로마의 군사, 행정, 상업적 목적을 위해 건설됐으며 특히 로마군의 신속한 이동을 위한 핵심 기반이었다. 바울은 로마가 대제국 완성을 위해 건설한 도로를 따라 걸으며 복음을 전한 것이다. 빌립보는 지금도 발굴이 진행 중이지만 현재 볼 수 있는 아고라(시장)와 분수, 목욕탕 같은 유적을 통해 바울 시대의 빌립보를 알 수 있었다.
고난 속에서 꽃피운 열매
순례팀은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기에 앞서 매질 당한 바위에서 잠시 묵상했다. 바울이 박해받은 이곳은 훗날 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인 것 같다.
8각형 모양의 교회는 바울이 순교한 뒤 AD 5세기에 설립됐다. 예배드린 장소로 추정되는 예배당 밑은 모자이크로 한땀 한땀 작업한 벽화로 꾸며져 있었다. 교회 옆에는 침례식이 이뤄진 장소도 있다.
루디아가 세례받은 곳
순례팀은 빌립보에서 차량으로 10분 정도 이동해 ‘루디아 기념교회’를 찾았다. 성지순례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루디아는 고위층이 입는 옷감을 만들며 바울의 든든한 동역자 역할을 한 인물이다. 오늘날로 치면 비즈니스 선교를 한 것이다. 루디아가 세례받은 십자가 모양의 강가 지점은 물속으로 계단을 세 개나 내려가야 했기에 다른 곳보다 수심이 꽤 깊었다. 이 강가는 1년 내내 물이 흐른다. 세례받은 장소 앞에 있는 루디아 기념교회 안에는 루디아 및 바울의 기념비와 바울의 선교 여정을 그린 지도 등이 벽화로 꾸며져 있었다. 루디아 기념교회는 많은 유아 세례식이 이뤄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김 목사는 “사회적·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던 루디아가 세례받을 때 그동안 세상에 꼭꼭 숨겨둔 자신의 위선과 가면을 벗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라며 “우리가 모두 바울처럼 선교에 헌신하지 못해도 루디아처럼 얼마든지 주님 안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며 순례객들을 도전했다.
바울처럼 매일 주의 길 걷고파
장혁종 여수 서촌교회 목사는 “바울이 돌에 맞으며 죽임 직전의 위기 속에서도 복음을 전한 열정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기회였다”며 “전도 여행을 떠났던 바울을 묵상하며 매일 주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기로 다짐했다”고 말했다.
박성실 여수 애양원교회 장로는 “바울의 여정을 밟으면서 어떤 환경에서도 혹여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의 일을 묵묵히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바울의 유럽 선교는 한 사람의 순종이 어떻게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는 편안한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지만, 그 신앙의 뿌리에는 감옥에 갇혀서도 찬양했던 바울과 같은 이들의 흔적이 깊이 배어 있다. 믿음의 선조가 어떻게 복음의 씨앗을 뿌렸는지 되새기는 최소한의 노력은 대가 없이 복음을 알게 된 후대들의 몫 아닐까.
네압볼리·빌립보(그리스) 글·사진=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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