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 연휴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생애와 정신이 깃든 공간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막대한 재산과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에 나섰던 우당 이회영과 형제들의 업적을 기억하는 이회영기념관이 서울 종로구 사직동의 ‘캠벨 선교사 가옥’에 새 둥지를 마련하고 지난 11일 문을 열었다.
긴 세월 ‘캠벨 하우스’로 불렸던 이곳에는 20세기 초 화강암으로 지은 2층 높이의 양옥 두 채가 있다. 이 집은 서울시가 2019년 우수건축자산으로 지정했다.
미국 남감리회 파송을 받은 조세핀 캠벨(1853∼1920) 선교사가 이 집에서 살았다. 1897년 우리나라에 온 그는 배화여대 전신인 배화학당을 세워 근대 여성 교육의 문을 열었다.
독립을 꿈꾸며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우당(友堂) 이회영(1867~1932)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이회영 기념관’이 이곳에서 이전 개관한 건 독립과 개화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의 역사적 만남으로도 평가받는다.
더욱이 이 집은 이회영 선생의 부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은숙 선생이 서울에서 활동할 때 머물던 당주동 집과 불과 몇백 걸음 떨어져 있다. 이회영 선생의 동지인 신흥무관학교 교관 김경천 장군 집터 또한 기념관 바로 아래에 있다.

이회영기념관은 이전 개관을 기념해 특별전 ‘등불 아래 몇 자 적소’도 마련했다.
우당의 자필 편지 13통과 편지 봉투 8장, 부친 이회영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딸 규숙의 전보 3장 등이 최초로 공개됐다. 편지들은 우당의 손자인 이종걸 이회영기념사업회 이사장이 부친 유품을 정리하던 지난해 겨울 발견했다.
편지 대부분은 우당이 독립을 위해 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활약하던 1931년 쓴 것으로 93년 만에 세상에 공개되는 셈이다.
우당은 한자 대신 한글로 편지를 썼다.
서울시는 “조선 양반가에서 성장해온 이회영이 조선 지배 언어체계를 스스로 벗어던지고 있다는 점, 과장된 수식어나 관념어 없이 일상어 중심으로 글을 쓴 점, 수신자인 아내에게 한결같이 존칭어를 사용한 점 등을 통해 자유 평등 사상을 추구한 이회영의 세계관과 됨됨이를 유추해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회영기념관은 넓은 마당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마당에는 수령을 합해 300살이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어 볼거리도 풍부하다.

기념관 1층에는 우당의 형제에 관한 소개와 서울 도심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벗집 마루가 있다. 전시장으로 가는 길 복도와 계단 곳곳에는 서울과 서간도, 베이징, 상하이, 다롄 등 일제와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여정과 독립운동 명문가의 생애를 엿볼 수 있다.
독립운동의 공로로 우당과 초대 부통령을 지낸 동생 이시영 등 여섯 명의 형제들은 모두 건국훈장을 받았다. 2018년에는 부인 이은숙까지 건국훈장에 추서됐다.
2층 전시실에는 우당이 그린 그림과 이은숙이 쓴 ‘서간도 시종기’와 육필 원고 등을 볼 수 있다. 체코군단의 지원으로 독립군이 사용했던 모신나강 소총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했던 권총과 같은 종류의 총도 전시돼 있다.
기념관은 매주 화~주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조선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이자 갑부였던 이회영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형제를 비롯해 면천한 노비 등 60여명과 함께 만주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만주로 떠날 때 이회영 선생이 처분한 토지만 892만5619㎡(270만평)에 달한다고 한다. 현재 공시지가로 조 단위의 막대한 금액이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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