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착한 사람’…각박한 세상서 널 생각해” [기억저장소]

Է:2024-09-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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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일씨가 육군 항공대에서 부사관으로 복무하던 시절 찍은 사진. 유가족 제공

그날은 아침부터 유달리 기분이 안 좋았다. 나쁜 꿈을 꾼 것도 아닌데 아침부터 힘이 없었다. 매일 챙겨 먹던 점심도 걸렀다. 아들이 탄 헬기가 추락했다는 전화가 걸려 온 건 그때였다. 박인식(69)씨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는 병일이가 탄 헬기가 추락했다고 했다. 그 뒤로는 어떻게 일이 마무리됐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박병일(사망 당시 35세)씨는 민간 항공 화물 운송 업체 소속 5년 차 헬기 정비사였다. 사고가 벌어진 건 2022년 5월 16일, 지역 파견근무 종료 일주일을 앞둔 날 아침이었다. 평소처럼 숲길 조성용 자재를 운반하던 HL9490 헬기는 경남 거제시 선자산 정상 인근에 추락했다.

지상에서 헬기 급유 업무를 담당하던 팀원 김진호(52)씨는 동료들이 탄 헬기가 서서히 추락하는 걸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추락 지점을 향해 뛰었다. 그때만 해도 모두 살아 있었다. 한쪽에선 통증으로 신음하는 소리가 나는 와중에 병일씨는 헬기 안에 잠든 듯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진호씨는 “처음엔 병일이 코 고는 소리가 나길래 잠시 기절해서 잠든 줄 알았어요. 안은 너무 어둡고 내가 임의대로 만질 수도 없고. 계속 구조요청을 했는데 (올 때까지) 거의 1시간이 흘렀는데, 구조할 때 보니까 머리가 심하게 다쳤더라고요. 출혈이 엄청 났을 텐데, 병일이가 입고 있던 오리털 파카가 (피를) 다 흡수했던 것 같아요”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2022년 5월 16일 오전 9시쯤 병일씨가 탄 에어팰리스 소속 HL9490 헬기가 경남 거제시 거제면 선자산 인근에 추락했다. 경남소방본부 제공

실제 병일씨는 사고 발생 2시간 후에야 병원으로 이송됐다. 사고 지점이 헬기 구조대가 좌표를 잡기 어려운 곳이라 지상 구조대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100m짜리 40도 경사로를 몇 번이고 내달리며 구조를 요청했던 진호씨는 “미치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심한 두부 출혈에 의식이 없던 상태였던 병일씨는 결국 뇌사 판정을 받았다. 사고 나흘 만인 2022년 5월 19일 병일씨는 심장과 간, 신장을 기증해 4명의 삶을 살리고 세상을 떠났다.

병일씨는 1987년 11월 30일 충북 음성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인식씨는 “축하금 20만원을 받았는데 술값으로 60만원을 썼을” 정도였다고 그때의 기쁨을 설명했다. 인식씨는 ‘한길로만 쭉 반듯하게 가라’는 의미로 돌림자 병자에 한일(一)자를 붙인 이름을 지어줬다.

그 이름답게 병일씨는 어린 시절부터 손으로 만들고 고치는 것을 일관되게 좋아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아버지가 큰맘 먹고 집에 들여놓은 컬러텔레비전을 몰래 해체했다 들키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컬러텔레비전이 귀했는데 그걸 뜯어버리더니, 공부하는 데 쓰라고 무리해서 사준 컴퓨터도 해체하더라”며 어린 시절 아들을 떠올린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박병일씨가 생전 아버지와 찍은 사진. 유가족 제공

중학생 무렵엔 고장 난 라디오와 공구로 방을 꽉 채웠던 병일씨는 스무 살 성인이 되면서부터 곧장 정비사의 길을 걸었다. 항공 정비 자격증을 따는 전문학교에서 2년, 육군 항공대에서 부사관으로 7년 경력을 쌓았다. 육군 항공대에서는 육군 참모총장 헬기 정비 일도 4년간 맡았다. 마지막 소속인 운송 업체에선 5년차 정비사였다.

일찍부터 객지 생활을 시작했지만, 병일씨는 매일 부모님에게 전화하는 살가운 아들이었다. 멀리 있어 쉬는 날마다 집에 오지 못해도 한 달에 한 두 번은 꼬박꼬박 집에 다녀갔다. 아버지 인식씨는 “7년 전 누나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지는 일 하러 나가 있으니, 늘 엄마가 마음에 걸린다고 챙겼다. 병일이가 제일 많이 하던 말이 ‘엄마 사랑해’였다”면서 “하나 남은 아들, 걔가 내 모든 것이었다”고 울먹였다.

병일씨는 사고 당시 민간 업체를 떠나 소방으로 이직 준비를 하던 상태였다. 안정적인 환경을 갖추고 가정을 꾸리고 싶어던 병일씨는 충북소방서 서류 전형을 통과한 뒤 구술 면접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채용 예정 인원 1명에 병일씨가 유일한 지원자였다고 한다. 인식씨는 “소방 헬기도 거의 합격해서 발표만 나면 된다고 했다”며 “그 전에 보름 정도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했다. 일주일 있으면 집에 가니까 엄마 모시고 바닷가라도 여행 다녀오자고 했는데 그게 마지막 통화가 됐다”고 했다.

그런 인식씨에게 아들의 장기기증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주치의가 처음 권유했을 때도 “절대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그런데 십수 년 전 병일씨가 스치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TV에 나오는 장기기증 사연을 함께 보던 중 “어느 부모가 그걸(장기기증) 하겠냐”는 아버지의 반응에 병일씨는 “장기기증하고 가는 게 좋아. 어차피 가는 건데 몇 사람 살리고 가면 좋은 거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병일씨가 남긴 소지품에선 헌혈증 40~50장이 나왔다. 골수 기증 서약도 해뒀다고 한다.

인식씨는 “아들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걸 믿기 어려워서 뭐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면서 “그래도 아들은 이걸 원하지 않았을까 싶다”고 했다. 인식씨는 지금도 매일 아들 생각을 한다. 그는 “하루에도 열두 번은 생각난다. 2년간 매일 이러다 보니 이젠 좀 바보가 되는 것 같다. 사고 조사도 아직 안 끝났는데 자꾸 기억도 흐려진다”고 토로했다.

병일씨를 매일같이 떠올리는 건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봤던 직장 선배이자 동료인 진호씨도 마찬가지다. 진호씨는 2017년 4월, 팀에 합류하러 경남 통영에 내려온 병일씨를 처음 만났을 때도 잊지 못한다. 건장한 체격에, 뿔테 안경을 낀 순한 얼굴의 병일씨는 “담배 하냐. 술은 좋아하냐”는 물음에 “예, 담배 합니다. 술은 많이 못 먹어도 좋아합니다”라고 답했다. 진호씨는 “바로 합격이었다”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5년을 동고동락했다. 15살이나 차이나는 두 사람이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된 건 세월때문만은 아니다. 진호씨는 “병일이는 원체 천성이 착했다. 우리 회사, 일이 결코 환경이 좋지 않은데도 잘 적응했다. 불편하고 힘든 게 있어도 잘 웃고, 지가 잘 맞추려 하고 어려운 사람 돕고 그러니까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도 ‘우리 달래주는 거 주(酒)님밖에 더 있냐’며 한 잔같이 하면 마음을 푸는 친구’였던 병일씨는 많게는 20살 많은 기장과도 관계가 좋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병일씨 목숨을 앗아간 그 날 사고가 더욱 애달프다. 헬기 정비사가 헬기 운행에 동승할 의무는 없었기 때문이다. 병일씨는 그날 기장 부탁을 받아 업무를 돕고자 헬기에 탑승했다가 변을 당했다고 진호씨는 설명했다. 그는 “(통상) 기장님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헬기에 같이 타거나 지상에서 유도해 주는 식으로 도와준다”면서 “저희는 항상 병일이가 직접 탔다. 일을 안전하게 하려고 (헬기에) 탑승해서 봐준 건데, 그저 도와주려고…”라며 뒷말을 삼켰다.

진호씨는 안타까움에 병일씨 빈소를 사흘 내내 지켰다. 지금도 저녁 먹으며 농담하고 장난치던 병일씨를 자주 떠올린다. 그는 “사고 전날 저녁에 병일이랑 저녁을 먹으면서 ‘내일은 일 끝나면, 업자가 소고기 안 사주겠나. 내일 맛있는 소고기 먹자’ 그랬다”면서 “‘과장님 오늘 뭐 합니까? 저녁에 뭐 합니까?’하던 목소리가 그립다”고 말했다.

남은 사람들은 병일씨를 저마다의 방법으로 가끔 또 자주 떠올린다. 서로 다른 시간, 장소에서 병일씨와 마주쳤던 이들이지만 입을 모아 그를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동창 양태운(38)씨는 병일씨를 ‘가장 마음 편했던 친구’이자 ‘철들었던 효자’로 기억한다. 그는 “(병일이는) 부모님을 많이 생각하고 철이 들었던 것 같다”면서 “정비 일은 특수직이라 금액적으로도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다고 한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애들이 제일 많이 싸웠던 고등학생 때도 병일이는 한 번을 안 싸웠다. 자기가 속더라도 조금 손해 보더라도 그냥 해주는 느낌이 많았다”면서 “아등바등 사는 사람들을 많이 접하다 보면 그냥 착한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는데 병일이가 그런 마음 편한 친구였다”고 말했다.

태운씨는 “(병일이가) 유독 웃음이 많았는데 지금도 가끔 그 높은 웃음소리가 떠오른다”며 “사람들은 ‘착하면 바보’라고들 하는데, 지금 같은 세상이 병일이 같은 착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힘주어 말했다.

진호씨는 “병일이가 꿈에 나온 날이면 잠 깨고 나서 ‘로또 번호라도 알려주지’라고 한다”고 웃으면서도 혼자 밥을 먹다가도 그가 떠올라 앞에 술잔 하나 따라놓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장기기증은 병일이다운 선택이었다”며 “어딘가에 병일이 일부분이 같이 살아간다고 생각을 하려 한다”고 전했다.

인식씨는 “기증을 결정할 때 정말 떠나보낸다는 게 너무 겁이 났다. 그런데 (장기기증을 하고) 우리 아들이 어딘가에는 살아 있고 일부만 갔다는 생각을 하니 무지하게 위안이 됐다”면서 “비록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우리 아들 심장으로 건강하게 살고 있으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른 이에게 생명을 건네고 떠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 우리가 ‘기증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누군가에게 무엇보다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기억저장소]는 기증자들의 숭고한 죽음과 이들에 대한 사랑하는 이의 기억을 꼭꼭 담아 오래 보관하고자 합니다.


성윤수 기자 tigri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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