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뉴얼이 아닌 것 같아서 더 좋았어요.”
유명 베이글 가게에서 촬영한 영상으로 화제가 된 시각장애인 안승준(42)씨는 지난 19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가게 직원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회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의 유튜브 채널 ‘알TV’에 출연하는 그는 지난달 6일 제작진으로부터 해당 가게에서 인기 메뉴를 사오라는 미션을 받았다
홀로 가게를 찾아간 그에게 한 직원은 ‘시각장애인 안내 보행법’을 정확히 이행했고, 이 장면은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로 퍼지며 ‘미담’이라는 칭찬이 쏟아졌다.
시각장애인에게 방향을 안내할 때는 몸에 직접 손을 대지 않고, 팔꿈치를 잡도록 해야 한다. 이 방법을 시각장애인 안내 보행법이라고 부른다. 안씨는 “직원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 당시에는 (안내 보행법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며 “나중에 영상을 확인한 뒤 ‘내가 설명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20일 해당 가게를 방문해 문의한 결과, 입사 시 관련 교육은 받지만 별도의 시각장애인 응대 매뉴얼이 마련돼 있지는 않다고 한다. 안씨 역시 “매뉴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며 “그래서 더 감동받았다”고 말했다.
“‘핫플(Hot Place의 줄임말. 인기 명소)’에 간다고 예를 들어 보죠. 보통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가 있는지 미리 확인해보거나, 도와줄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해요. 절차를 거치고, 요구하고, 실랑이를 한 뒤에야 권리를 찾을 때가 많죠.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런 준비 없이 방문했는데도 자연스러운 응대를 받았어요. 매뉴얼에 의해서가 아니라, 손님 중 한 사람으로서요.”

안씨는 매뉴얼이 장애인의 편의에 항상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비행기 티켓이 있는데도 매뉴얼상 동행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로 탑승을 거부당한 적이 있다. 결국엔 비행기에 타긴 했지만,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며 “나는 눈이 안 보일 뿐 걷는데 문제가 없는데도 매뉴얼상 휠체어를 타야 안내가 가능하다고 요구하는 항공사도 많다”고 지적했다.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가 미리 마련돼 있는 것도 좋죠.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려면 모든 가게마다 매뉴얼을 만들어야 할 거예요. 이번 사례처럼 굳이 합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아요.”
직원은 안씨를 응대할 때도 좋아하는 빵이 무엇인지 묻고, 메뉴를 추천했을 뿐 과한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 안씨는 직원의 그런 ‘담백한 대응’이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배려처럼 느껴졌다고 전했다. 결국 중요한 건 상대가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라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든 어르신에게 ‘도와드릴까요’라고 묻는 게 매뉴얼 때문은 아니잖아요. 어르신께는 무거워 보이는 짐이 제게는 그다지 무겁지 않을 것 같아 의사를 여쭤보는 거죠. 이런 마음이면 충분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장애인을 위해서 복잡하고, 특별하고, 굉장히 정리된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안씨에 따르면 화제가 된 베이글 가게 영상은 사실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전자기기의 사용을 잠시 중단하는 것)’를 주제로 제작됐다. 안씨가 휴대전화 없이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게 영상의 취지였다는 얘기다. 휴대전화는 흰지팡이만큼이나 시각장애인의 필수품으로 꼽힌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앱) 등 시각장애인에게 유용한 기능이 많아서다.
아무런 준비도, 일행도, 휴대전화도 없이 길을 나서는 건 안씨에게 큰 도전이었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불쾌한 일과 맞닥뜨릴 가능성이 높았다. 안씨에게 휴대전화 없이 외출하는 일이 어땠는지 묻자 “네비게이션도, 이정표도 없이 처음 와 본 곳에서 목적지를 찾아 헤매는 기분을 상상해 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영상 내용은 제작진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갔다. 안씨가 길을 헤매기도 전에 홀로 있는 그를 본 시민들이 다가와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지하철역에서 길을 헤매는 그에게 한 시민은 “직진하시라”며 방향을 찾아줬고, 길에서 만난 다른 시민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베이글 가게까지 함께 이동했다. 베이글 가게에서 직원의 응대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충격적일 만큼” 놀라웠다. 안씨는 “이런 경험이 반복됐다면 저의 외출이, 그리고 저 혼자서의 시도가 더 많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20년차 베테랑 교사인 안씨는 한빛맹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가 시력을 잃은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간단한 수술을 받고 눈을 떴는데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수학이 좋아 무던한 노력 끝에 교사가 됐고, 지금은 강연이나 칼럼 등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에 앞장 서고 있다.
알TV와 인연을 맺은 것도 장애인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을 흔들고 싶어서였다. 그는 척수장애인인 이원준씨와 장애인 토크쇼 ‘썰준’을 진행하고, ‘MZ세대 게임 배우기’와 같은 참신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장애 문제가 무겁지 않게 다뤄지면 좋겠어요. 장애인과 관련된 콘텐츠라고 하면 대부분 ‘감동’이나 ‘불굴의 의지’ 같은 키워드를 떠올리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웃기는 아저씨 하고 싶거든요. 시각장애인 아저씨랑 척수장애인 아저씨랑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모델 워킹도 하고, 그냥 재밌게 노는 콘텐츠요. 예능을 하고 싶어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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