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대방 동의 없이 녹음한 통화 내용도 유죄 판단 증거로 쓰일 수 있다고 대법원이 판결했다. 다만 대법원은 사생활을 중대하게 침해했을 경우에는 그 증거 능력이 인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공공단체 등 위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최모씨 등 3명에게 유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8일 밝혔다.
농협·수협·산림조합 전국동시조합장 선거가 있었던 2019년 남해 해경은 김모 부산시 수협조합장의 당선 배경에 ‘돈 선거’가 있었다고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최씨는 김씨의 선거 조력자였고, 해경은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 최씨 휴대전화를 조사하다가 관련 통화 녹음파일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최씨 배우자가 남편의 여자관계를 의심해 휴대전화 자동녹음 기능을 몰래 활성화해놓은 덕분이었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최씨 등이 김씨 당선을 위해 포섭할 어촌계 선거인 명단을 만들어 부둣가와 어판장 등지에서 10~20만원씩 돈을 건네는 방식으로 표를 매수했다고 보고 재판에 넘겼다.
피고인들은 녹음파일은 모두 불법감청으로 취득한 것이라 증거로 쓰일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1심은 녹음파일 전부를 유죄 증거로 인정했다. 하지만 2심은 최씨와 배우자 사이 통화만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반면 최씨와 다른 피고인 사이 통화는 당사자들 동의 없이 녹음이 이뤄져 위법하다고 봤다. 이 때문에 김씨 혐의 중 사전 선거운동 관련은 무죄로 바뀌었다. 다만 ‘표 매수’ 혐의는 유죄가 유지됐고 형량은 징역 1년2개월에서 1년4개월로 오히려 늘었다.
검찰과 피고인 양측이 판결에 불복하면서 최씨와 배우자 사이 통화는 상고심에서도 쟁점이 됐다. 대법원도 통화녹음 중 최씨와 배우자 사이 이뤄진 것은 증거로 쓰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최씨에 대한 징역 8개월 형도 그대로 유지됐다.
대법원은 “배우자가 최씨 동의 없이 휴대전화를 조작해 통화내용을 녹음했다는 점에서 배우자가 최씨의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침해했다고 볼 여지는 있다”면서도 “배우자는 전화통화의 일방 당사자로서 최씨와 직접 대화를 나누며 그 내용을 들었으므로 사생활의 비밀이나 통신의 비밀이 침해됐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은 대화에 끼지 않는 제3자가 몰래 녹음하는 것은 불법감청으로 규정하지만, 대화에 참여한 사람이 몰래 녹음하는 것은 불법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대법원은 최씨 배우자가 선거 범행 관련 증거로 사용하려는 고의적 의도로 녹음한 것도 아니고, 수사기관이 녹음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며, 적법하게 압수된 휴대전화를 분석하던 중 증거가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 수집 과정에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대법원은 “증거 수집 절차가 개인의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해 사회 통념상 허용되는 한도를 벗어났다면, 단지 기소에 필요한 증거라는 사정만을 들어 곧바로 진실발견이라는 공익이 개인의 인격적 이익 등 보호이익보다 우월한 것으로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단서를 달았다.
두 사람 통화 내용을 한쪽이 몰래 녹음해 형사사건 증거로 제시한 사례일지라도 상대방의 사생활을 중대하게 침해했다면 증거능력이 부정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지는 않아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이뤄진 통화녹음이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 것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판례가 누적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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