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는 여배우를 기다리지 않았지만…

19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개막하는 ‘고도를 기다리며’
신구·박근형·박정자 등 원로배우 출연… 국내 첫 여배우 캐스팅

오는 19일 개막하는 파크컴퍼니의 ‘고도를 기다리며’ 연습 장면. 오경택이 연출한 이 작품에는 신구(왼쪽부터), 박정자, 박근형, 김학철 등 원로배우들이 출연한다. 원작자인 사무엘 베케트는 생전에 ‘고도를 기다리며’에 여배우가 출연하는 것을 반대했었다. 파크컴퍼니

지금부터 70년 전인 1953년 프랑스 파리에서 현대 연극의 기념비적 작품이 초연됐다. 바로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1906~1989)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 2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나무 한 그루를 배경으로 부랑자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가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두 사람 외에 독재적인 포조와 그의 노예 럭키가 1막과 2막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1막과 2막 끝에 소년이 나와 고도가 못 온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기존 연극과 달리 시공간적 배경이 불확실하며, 줄거리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다. 고도의 정체에 대해 ‘구원자’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이것 역시 확실치 않다. 인간의 고독과 소통 부재, 존재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초연 직후 논쟁과 화제를 일으키며 다양한 언어권에서도 잇따라 공연됐다. 그리고 베케트에게 1969년 노벨문학상을 안겼다.

1969년 한국 초연… 극단 산울림에서 50년간 공연

우리나라에서는 1969년 연출가 임영웅에 의해 초연됐다. 개막을 앞두고 베케트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온 덕분에 전석이 매진됐다. 그리고 이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임영웅은 이듬해 극단 산울림을 창단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2019년까지 50년간 극단 산울림의 대표 레퍼토리로 1500회 넘게 공연됐다. 단일 작품으로 50년간 지속해서 공연된 것은 국내에선 유례가 없다.

현대 연극의 기념비적 작품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 퍼블릭 도메인

그런데, ‘고도를 기다리며’가 국내 연극계 거장인 임영웅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보니 후배들은 선뜻 도전하지 못했다. 다만 임영웅이 2019년 50주년 공연을 끝으로 은퇴하면서 “새로운 ‘고도를 기다리며’가 이어지면 좋겠다”고 말한 이후 후배 연극인들이 도전에 나서고 있다. 올해만 해도 ‘고도를 기다리며’가 지난 8월 고려대극예술연구회 출신 친구 사이인 배우 주진모, 연출가 김기하, 한국셰익스피어학회 회장인 교수 이현우 등을 중심으로 올라간 바 있다.

또 다른 ‘고도를 기다리며’가 오는 19일부터 내년 2월 18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 연출가 오경택이 연출하는 이번 ‘고도를 기다리며’는 원로 배우들 출연으로 일찌감치 화제를 모으고 있다. 고고 역의 신구(87), 디디 역의 박근형(83), 럭키 역의 박정자(81), 포조 역의 김학철(63)과 함께 소년 역으로 배우 김리안(27)이 출연한다. 소년을 제외한 네 원로배우의 연기 경력만 무려 228년이다.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에 여배우 캐스팅 반대

특히 이번에 눈길을 끄는 것은 여배우 박정자와 김리안의 출연이다. 국내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역사상 여배우의 출연은 처음이다. 박정자가 제작사 파크컴퍼니에 먼저 출연을 요청하면서 성사됐다. 최근 배우 성별과 관계없이 배역을 정하는 젠더 프리 캐스팅이 확산되고 있지만, ‘고도를 기다리며’의 경우 해외에서 여배우 캐스팅으로 여러 차례 소송으로 이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연출가 임영웅(오른쪽)이 1969년 선보인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왼쪽). 당시 초연에서 이 작품이 큰 화제를 모은 덕분에 임영웅은 이듬해 극단 산울림을 창단했다. 극단 산울림

‘고도를 기다리며’는 희곡의 모호성 덕분에 많은 연출가에게 새로운 해석에 대한 도전욕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새로운 연출이 자신의 작품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 베케트는 희곡에 적힌 지시사항에만 충실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1988년 네덜란드의 한 극단이 여배우들로만 캐스팅해 공연을 준비하자 바로 네덜란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소송에서 베케트는 “여성은 전립선이 없기 때문”이라는 반대 이유를 들었다. 극 중 디디가 종종 소변을 보기 위해 무대를 떠나는 설정에 대해 전립선 문제가 있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소변이 자주 마려운 이유로 전립선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반박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베케트가 1990년 사망한 이후 그의 모든 작품 저작권을 상속받은 조카 에드워드 베케트가 소송을 이어갔다. 네덜란드 극단은 여배우가 출연할 뿐 텍스트나 무대 연출이 바뀌는 것은 없다고 항변했고, 법원은 “여성이 출연한다고 해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의도를 해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만 이 작품이 1991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초청된 것과 관련해 “베케트는 여배우의 출연을 반대했다”는 메시지를 읽은 뒤 막을 열라는 조건을 붙였다.

베케트 에스테이트, 원작 희곡의 변형을 금지

이 사건과 관련해 프랑스 법원은 1992년 네덜란드 극단이 베케트의 저작인격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이후 에드워드 베케트는 ‘베케트 에스테이트(베케트 자산 관리기구)’를 통해 ‘고도를 기다리며’ 등 삼촌 작품의 저작권 계약 조건으로 원작대로 공연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대사의 추가, 삭제, 수정은 안 되며 음악이나 특수효과가 더해져서도 안 된다.

지난달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 집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연출가 오경택(왼쪽부터)이 연출하는 이번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신구,박정자, 박근형, 김학철, 김리안이 출연한다. 파크컴퍼니

실제로 영국에서 1994년 베케트의 ‘발자국 소리’ 공연은 극중 주인공이 원작대로 무대 위를 서성이는 대신 극장 곳곳을 배회하는 연출 때문에 상연이 중지됐다. 미국에서도 1998년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고와 디디는 흑인, 포조와 럭키는 백인 캐스트로 했다가 베케트 에스테이트로부터 “작품에 인종 문제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2000년 뉴욕 프린지 페스티벌에선 베케트 에스테이트를 비판하는 ‘공연하면 안 돼, 절대로. 그렇지 않으면 고소할 거야. 무덤에서 고소할 거야’라는 제목의 공연이 올라가기도 했다.

특히 2003년 시드니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고도를 기다리며’ 논란은 연극계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 당시 호주의 거장 연출가 닐 암필드는 작품에 타악기 연주를 넣었다가 에드워드 베케트로부터 음악을 빼지 않으면 공연을 중지시키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페스티벌과 극장이 에드워드 베케트와 협의에 나선 덕분에 공연이 중지되지는 않았지만 분노한 암필드는 “베케트 에스테이트는 ‘예술의 적’”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베케트 에스테이트의 엄격한 계약 조건 때문에 ‘고도를 기다리며’가 무대에 올려지는 횟수는 갈수록 줄고 있다.

젠더 프리 캐스팅 확산 속 규제가 다소 완화

다만 ‘고도를 기다리며’에 여배우가 출연하는 것은 예전보다 규제가 다소 느슨해진 덕분에 간간히 올라가고 있다. 2006년 이탈리아 극단이 고고와 디디 역에 여배우들을 캐스팅했다가 베케트 에스테이트로부터 소송당했지만 승소한 것이 전환점이 됐다. 이 공연 역시 여배우가 출연했지만 연기, 무대, 의상, 분장 등 다른 요소는 베케트의 지시사항을 충실히 따랐다.

지난 2019년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 50주년 기념 공연 장면. 국립극단-극단 산울림

그런데, 2019년에도 미국 오하이오주 오벌린 칼리지의 학생 극단이 여배우만 출연하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준비하다가 베케트 에스테이트의 문제 제기에 공연을 취소한 사례가 있다. 실제 소송까지 이어지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반면 올 초 네덜란드 흐로닝언 대학 예술센터는 학생극단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남성만 오디션을 보게 했다는 이유로 공연을 취소시켰다. 남성 대상으로만 오디션을 본 것이 대학의 다양성 정책을 위배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여배우가 출연하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연출가인 오경택은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의 보편적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 만큼 성별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면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올릴 때는 여배우 캐스팅을 보다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싶다”고 밝혔다. 무덤 속 베케트는 이런 변화를 어떻게 생각할까.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