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 간 합의가 없다면 가장 가까운 직계비속 중 최연장자가 ‘제사 주재자’를 맡는다는 대법원 판단이 11일 나왔다. 아들에게 우선권을 주던 기존 대법원 판례가 15년 만에 깨진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숨진 A씨 유족 간 벌어진 유해 인도 사건과 관련한 원심판결을 이날 파기·환송하며 이같이 밝혔다.
A씨는 1993년 부인과 결혼해 딸 2명을 낳았다. 그는 이어 2006년 다른 여성으로부터 아들을 얻었다. A씨가 2017년 사망하자, 혼외자 생모는 A씨 부인·딸들과 합의하지 않은 채 고인 유해를 경기도 파주 추모공원 납골당에 봉인했다. 이에 A씨 부인과 딸들은 “유해를 돌려달라”며 생모와 추모공원 측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1·2심 재판부 모두 이들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존 판례는 유족 간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고인의 장남 혹은 장손자가 제사 주재자가 된다. 아들이 없을 경우 장녀가 제사 주재자가 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이날 대법원은 “제사 주재자는 공동상속인 간 협의에 의해 정하되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은 한 피상속인 직계비속 중 남녀, 적서(적자와 서자)를 불문하고 최근친 연장자가 제사 주재자로 우선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현대 사회 제사에서 부계혈족인 남성 중심 가계 계승 의미는 상당 부분 퇴색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제사용 재산 승계에서 남성 상속인과 여성 상속인을 차별하는 것은 정당화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장남 또는 장손자 등 남성 상속인을 우선하는 것은 성별에 의한 차별을 금지한 헌법 11조, 개인 존엄과 양성평등에 기초한 혼인과 가족생활을 보장하는 헌법 36조 정신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대법관 전원은 기존 판례를 변경하는 데 동의했다. 다만 4명은 협의가 없는 경우 개별 사건 특수성을 고려해 법원이 결정하도록 하고, 배우자도 유체·유해 귀속자에 포함해야 한다는 소수 의견을 냈다. 대법원은 법적·사회적인 안전성을 위해 변경한 법리는 판결 선고 이후 제사용 재산 승계가 이뤄지는 경우에만 적용키로 했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