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 목사/청란교회 목사, 하이패밀리 대표, 동서대학교 석좌교수(가족생태학)

데이터는 미래의 예언자다. ‘데이터 신호’는 단순한 소비 수치가 아니다. 시대를 꿰뚫는 트렌드가 있다. 사회 심리학과 행동과학이 있다. 때로 인류학과 인문학의 시그널로 읽힌다. 데이터 속에 사회사(社會史)가 있고 인간 심성사(心性史)가 있다. 대한민국 인구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가톨릭⸱기독교⸱불교 3색 종교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을 통계로 들여다보았다.
2019년 10월 처음으로 인구 자연증가율이 0%에 그쳤다. 이는 예고편이다. 2022년 2분기 합계출산율은 사상 최저치(0.7명대)를 기록했다. 이대로라면 100년쯤 후엔 대한민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소멸하게 된다. 최악의 시나리오다. 이래서 ‘민족의 자살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초(超) 저출산율만이 아니다. 초(超)고령사회 진입이 눈앞에 와 있다. 2025년이면 한 반도를 강타할 것이다. 쓰나미다. 통계청 전망에 의하면 2070년의 총인구는 3766만 명, 노인 인구 비율은 46.4%다. 2017년 고령화사회(65세 인구 비중 7%)를 맞이한 한국은 2025년 초고령사회(14%)에 이를 전망이다. 나라 전체가 심각한 ‘조로증(早老症)’에 걸리게 된다. 무전장수(無錢長壽), 유병장수(有病長壽), 독거장수(獨居長壽) 등으로 인한 복지쓰나미가 몰려온다. 장수 리스크(longevity risk)가 커진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 피터 드러커는 말한다. ‘수치로 측정되지 않는 것은 관리되지 않는다’고. 주목해야 할 수치는 한둘이 아니다. 2025년이면 베이비붐 세대가 75세 이상 후기고령자가 된다. 이때를 전후해 사망자가 연간 152만명에 이른다. ‘다(多)죽음 사회’가 온다. ‘임종난민’, ‘장례대란’이 머지않다.
한국인은 66~83세까지 17년을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 삶의 5분의 1이다. 말년에는 요양시설과 종합병원 응급실⸱중환자실을 오가다 그 쳇바퀴 어딘가에서 죽음을 맞는다. 우리나라 ‘최빈도 죽음’이다.
서구사회는 ‘조력 존엄사(의사 조력 자살)’를 허용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태어날 권리는 내게 없지만 죽을 권리는 스스로에게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도 이미 그 태풍권에 들어서 있다. ‘조력존엄사법’이 국회에 발의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조력 존엄사는 의사 조력 ‘자살을 통한 안락사’다. 사회적 논의도 없이 국민의 80%가 넘는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들이밀었다. 언제부터 우리나라는 사람의 생명까지도 설문조사에 의해 결정하는 나라가 되었나. 하지만 종교계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1인 가구 1000만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혈연 중심의 전통 가족도 이미 붕괴되기 시작했다. 20세기의 대 사건 중 하나가 소련이 전쟁 없이 무너진 일이다. 21세기의 대 사건은 혈연 중심 가족의 붕괴다. 출신 국적이 다른 ‘다문화가족’이 등장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동거가족도 끊임없이 늘었다. 재혼 부부와 그들의 성(姓)이 다른 자녀로 구성된 패치워크(조각보) 가족도 등장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윤석열정부는 대통령실에 종교다문화비서관 직제를 신설했다. 뜬금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영국은 2018년 1월,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직을 신설했다. 인간이 가진 고독과 소외에서 비롯되는 외로움을 줄이는 일이 의료비는 물론 교통사고와 범죄를 줄인다. 자살 예방의 최선책이다. 2021년 일본은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임명하고 총리관저 내각관방에 고독·고립 대책실을 출범시켰다.
종교다문화비서관 직제는 윤석열정부가 내세운 절묘한 국정 운영의 키다. 종교지도자들과 밥 한 끼 먹고 덕담으로 헤어지는 통과의례가 아니라 구체적인 파트너십으로 대한민국의 장래를 고민하자는 프러포즈다. 지난 7일 대통령실은 이 직제의 명칭을 ‘사회공감비서관’으로 바꾸었다. 종교계에 더 구체적인 주문을 한 셈이다. 공감없이 따뜻한 나라는 없다. 공감은 사회 통합의 최대 과제다.
종교계가 힘을 합쳐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은 수없이 많다. 복지 사각지대와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이 우선이겠다. 베이비 박스가 그렇고, 죽음지수를 높이기 위한 소원재단 앰뷸런스가 그렇다. 긍휼과 환대, 약자돌봄은 3색 종교가 공유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주제다. ‘비폭력 대화학교’나 ‘임종학당’ 같은 인문학 강좌의 공동 운영도 가능하다. 인문학이 부활하는 곳에 종교도 설 자리가 커진다. 나아가 사회소요지수(CUI)를 사회평화지수를 바꾸어 놓는 것은 오롯이 종교의 몫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최근 ‘매년 700만명이 대기오염으로 인해 조기 사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위기는 모든 인류의 공동 대처가 필요하다. 지금은 지구의 ‘울음’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탄소제로 운동이나 창조회복을 가장 앞서서 다룰 수 있는 곳은 교회와 성당과 절이다. 예술인들은 예술의 언어로 호소도 하고 답을 내놓고 있다. 이제 종교가 신앙의 언어로 답해야 한다. 그것은 사유가 아닌 행동의 언어다. 필요하다면 방과후 돌봄학교로 종교시설과 공간을 공유할 수 있다. 종교시설은 도시 한 복판에 있어 공유 공간으로 활용 가치가 높다.
생명과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공공선을 위해 머리를 맞댈 수 없을까? 이 세상에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나우’(‘나’를 있게 하는 ‘우리’) 정신 하나면 충분하다. ‘Now’ 지금이다.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