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화가 황창배(1947∼2001)는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선을 몇 줄 그으니 급류가 되고, 또 몇 줄 그으니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외로운 쪽배가 된다. 이른바 ‘무계획의 그림’으로 불리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황창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림마다 그 당시의 즉흥적인 감정에 충실하여 노력한다. 나는 내 그림을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무계획의 그림은 그 한계를 깨트려 주는 즐거움이 있다.”
서양화가 앙리 마티스가 색이 주는 즐거움을 추구했다면 황창배는 선이 주는 즐거움을 추구했다. 서예를 배우지 않았다면 일필휘지 휘두르는 자신감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무계획 그림의 끝판왕은 ‘숨은 그림 찾기’ 연작이다. 붓 가는 대로 선과 색을 칠한 뒤 그 비정형의 색채 덩어리에서 어떤 형상을 찾아내 구체적으로 살려낸다. 구름을 보고 연상되는 양떼를 그려 넣는 식이다. 그러다보니 산 사이에 여인이 누워 있는 신화적인 그림이 탄생하기도 한다.
그렇게 황창배는 파격과 일탈의 대명사가 됐다. 삶도 청개구리 같은 거꾸로 정신으로 일관했다. 그는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한국화)를 전공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간 1966년은 조국 근대화 기치 아래 우리 사회가 서구화 일변도로 나갔고, 미술계도 그런 분위기가 퍼지며 한국화를 선택하는 학생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73년 대학원에 들어간 뒤에는 훗날 장인이 된 철농 이기우(1921∼1993) 선생에게서 서예와 전각을, 한학자 청명 임창순(1914∼1999) 선생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그렇게 기본기를 닦은 덕분에 78년 국전에서 수묵화로 한국화 최초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대통령상 이후 그는 변신했다. 서울대 동양화과는 서세옥(1929∼2020) 교수 아래 수묵 추상화의 분위기가 강했지만 그는 틀에 갇히지 않고 전통 민화 등을 수용하며 채색화로 영역을 확장해갔다. “왜 한국화는 검은 수묵으로만 그려야 하냐, 나는 칼라(색)이 좋은데”라는 항변이었다. 한국화는 어떤 재료를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장지에 아크릴로 그림을 그렸다. 붓 대신 튜브째 물감을 짜서 그리기도 했다. 1989년 미 국무성 초청으로 뉴욕의 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다녀온 이후에는 추상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황창배의 한국화는 형태는 단순화되고 추상화되더라도 전통의 요소가 살아있다. 문인화에 있는 제발(그림에 곁들이는 글씨) 문화, 여백의 미, 낙관 등이 그것이다. 야생화를 긁어내기 기법으로 그려놓고는 빈 화면 가득 시를 써넣기도 하고, 닭을 그려놓고는 '꼬꼬댁'에 'X'표를 치고는 만화처럼 말풍선 안에 ‘哭高宅(곡고댁)’이라고 써서 언어유희를 했다. 제작 연도는 서기가 아닌 단기를 써서 화면 중앙에 휘갈기기도 했다.


화단은 그를 ‘한국화의 이단아’ ‘한국화의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 끊임없이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허물고 변화를 추구하는 그의 미술 인생은 안타깝게 중단됐다. 의욕에 불타던 54세에 담도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마감한 것이다. 생전의 파격 행보를 보여주는 유작 32점을 서울 종로구 평창 32길 김종영미술관에서 하는 초대전 ‘소정 황창배, 접변’에서 볼 수 있다. “전통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지 숭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전시를 보노라면 작가가 생전에 말했던 이런 작업 철학이 오롯이 전해진다. 9월 25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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