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랍니다. 누구도 전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술이 정치의 영향을 받지 않길 바랍니다.”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30)이 오는 18~2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리는 ‘발레 슈프림 2022’ 갈라 공연을 앞두고 소감을 밝혔다. 16일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김기민은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마린스키 발레단과 자신의 신상 변화를 묻는 질문에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솔직히 전쟁 이후 (러시아에 남은) 나를 공격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현재로선 4년 만의 한국 무대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것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1783년 설립된 마린스키발레단은 러시아를 클래식 발레의 본고장으로 만든 세계적인 명문 발레단이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라바야데르’ 등 주옥같은 발레가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김기민은 2011년 특별 오디션을 통해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했다. 이후 다양한 작품을 소화하며 승승장구한 그는 2015년 아시아 무용수로는 처음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승급했다. 단원 270명 가운데 수석 무용수는 13명에 불과하다. 그는 2016년엔 발레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를 한국 발레리노 최초로 수상했다.
“제가 올 1~6월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출연한 무대가 전막 기준으로 20개 작품으로 40번이었어요. 이 가운데 2주 안에 6개 작품을 한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파트너 6명이 돌아가면서 저와 연습하기도 했는데요. 말도 안되는 스케줄이었지만 작품에 대한 제 욕심이 그렇게 만들었는데요. 새로운 작품을 계속 익힐 수 있다는 게 마린스키 발레단에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김기민은 원래 지난해 국립발레단의 ‘라바야데르’에 주인공 솔로르 역으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라바야데르’는 김기민에게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안기는 등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초청받는 fp퍼토리다. 하지만 코로나19로 무산되면서 2018년 11월 마린스키 발레단의 ‘돈키호테’가 마지막 내한 무대가 됐다.
“한국 무대는 늘 서고 싶기 때문에 작년에 취소됐을 때 정말 속상했어요. 이번에 세계적인 발레 스타들과 함께 하는 갈라 무대로 한국 관객을 만날 수 있게 돼 기뻐요. 개인적으로는 갈라보다는 전막을 선호하지만 이번에 함께하는 무용수들과 함께라면 환영입니다.”
‘발레 슈프림 2022’ 갈라 공연에는 김기민을 비롯해 영국 로열발레단의 마리아넬라 누네즈,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도로테 질베르,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이사벨라 보일스턴,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프리드만 포겔 등 명문 발레단의 톱스타 19명이 함께한다. 내한 갈라 역사상 가장 화려한 출연진이다. 당초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과 볼쇼이 발레단에서 8명이 올 예정이었으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교체됐다. 김기민은 이번 갈라 공연에서 누네즈와 호흡을 맞춰 ‘해적’과 ‘돈키호테’의 그랑 파드되(2인무)를 선보인다.
“누네즈는 저랑 친하기도 하지만 정말 존경하는 무용수에요. 저랑은 2019년 갈라 공연에서 ‘해적’으로 처음 호흡을 맞춘 이후 3번 정도 같이 무대에 섰는데요. 언젠가 둘이 전막을 함께 하자고 했었는데, 아직까지 성사되진 못했습니다.”
흔히 발레리노의 전성기는 체력과 예술성이 밸런스를 이루는 28~34세 정도라고 한다.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예술성은 좋아지지만 체력이 하향곡선을 긋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기민은 “이번 갈라공연에 오는 프리드만 포겔이 올해 43살인데, 자신의 전성기는 지금이라고 내게 말했다. 나 역시 42~46살을 전성기로 만들고 싶어서 매일 근력운동을 하는 등 체력 관리에 신경쓰고 있다”고 말했다.
김기민은 이번 갈라 공연을 마친 후 9월 중순까지 한국에 머무를 예정이다. 오랜만의 귀국인 만큼 가족과 함께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한편 학생들에게 무료 마스터 클래스를 열 계획이다. 그는 “나 자신의 커리어도 중요하지만 나로 인해 후배들이 좋은 영향을 받기를 바라는 욕심이 크다”면서 “내가 한국 발레에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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