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력, 역사의 소환, 미래, 이념, 삶과 업보(業報)를 지나 투박한 실험성 대 연극 미학으로
대구연극이 코로나19를 뚫고 살아나고 있다. 공연들이 활발하게 무대화 되면서 연극, 뮤지컬, 오페라, 음악과 무용 등 공연문화축제로 문화도시 윤곽(輪廓)이 탄탄해지고 있고 대명동 ‘연극의 거리’도 창작 열기가 뜨겁다. 대명동은 정회원 28단체, 일반회원 16개 극단이 ‘공연거리’를 중심으로 연극 문화가 생산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데다 극단 60% 이상이 1개 극단 1개 소극장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다. 서울 대학로 다음으로 ‘공연창작지구’를 형성하고 있는 것도 국립극장을 유치할 수 있을 정도로 ‘연극 도시’의 신호다. 이러한 도시 움직임은 서울로 향하는 역주행 행렬이 이제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의 연극 전공자들이 지역 연극을 지켜내면서 공연예술 물줄기에 토양이 되고 있다. 창작 분위기를 더하고 있는 것이 ‘대명동에는 작가가 산다’는 희곡작가 발굴 프로젝트다. 대명 공연예술센터가 주최하고 안희철 작가를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신인 작가 양성을 올해 4년 차 운영되고 있는데 신작 공연을 다양한 방식으로 무대화 하고 있다. 특히 올해 ‘제39회 대구연극제’(이홍기 대구연극협회장, 3.21~ 4.6까지)에서 창작희곡 발굴이 두드러졌다.
우선 연극제 캐치프레이즈가 ‘더 파란과 함께 하는 대구연극제’다. 파란은 ‘젊음과 도전적인 연극으로 파란’을 일으키자는 의미로도 해석되면서 작명이 참신하다. 대구연극의 세대교체를 주도할 35세 미만 젊은 연극인들이 ‘파란 연극제’를 대구연극제 개최 일주일 앞에 공연됐다. 반디협동조합<인간증후군>, 어쩌다프로젝트< 쥐>, 극단 플레이스트 <아는 만큼 보인다>, 극단 폼 <물고기남자>, 극단 하루 <블루하츠>, 청년창작집단

|30대 연극인 그룹 ‘대구연극 변화의 신호, 더 파란연극제’
올해 ‘39회 대구연극제’의 큰 수확은 파란연극제 개최와 대상 작품을 수상한 극단과 젊은 연출가들의 등장이며 대구 초연 창작극이 생산적으로 공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파란연극제 7개 작품 중 반디 협동조합 ‘인간증후군’(작연출 윤주영), 극단 플레이스트 ‘아는 만큼 보인다’(작 전호성, 연출 권수은), 청년창작집단 ‘fly me to the moon’(작 조태흠, 김하윤 윤색 연출 이하미) 등 3편의 창작희곡이 발표되었다. 4개 작품도 발표된 작품을 탈 무대화시키려는 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변화의 신호가 긍정적이다. 인간의 본질, 소외와 계층 갈등, 양극화, 권력, 가족, 청년 세대, 종말과 구원이라는 소재를 담아내면서도 해석을 차별화하고 무대화하려는 실험적 태도가 신선하다. 재현의 연극미학 보다 무대가 거칠고 투박해도 현대적인 무대 언어로 시도하고 있다는 점들이 발전적이다.
이번 파란 연극제에서 대상과 연출상을 받은 어쩌다 프로젝트 ‘쥐’(박근형 작, 김형석 연출)는 인간의 폭력적인 현실을 투영하며 ‘인간의 삶과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인간이며 살인과 폭력, 약탈, 파괴, 무질서로 드러나는 카오스적인 세상을 ‘쥐’로 이미지화 은유적인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부와 빈곤, 양극화, 전쟁과 갈등 속에서도 인간은 공동체와 인간을 파괴하고 희망과 미래를 갈아 먹는 쥐와 닮아가고 있는 인간들을 형상화시켰다. 무대 천장을 공간 구조와 연결해 배관을 설치해 물이 쏟아져 집 구조의 균열이 드러날 수 있도록 했는데, 공동체는 몰락하고 살아 남기 위한 혼돈의 세상이 그려진다. 연출은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의 탈을 쓰고 살아가면서도 쥐와 닮아가는 비 상식적 인간을 향해 물로 씻어내 치유를 시도하고 사회와 인간을 향해 은유적 경고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 참신하다.
|역사의 소환 극단 <시간을 묻다>, <형兄>, <용단>
극단 에전의 <형>은 김태석 연출이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창작한 희곡이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0년 9월까지 대구에서 발생한 경찰과 시민들의 유혈 사태 10월 좌익 폭동 사건과 보도연맹학살사건을 한 가족의 이야기로 재구성하고 있다. 경북 경산과 영천지역에서 좌익 활동을 하던 영규(박일용 분)과 경찰인 동생 영만(황승일 분)의 시대의 이념 갈등과 분단의 역사에서의 한 가족사(史)를 투영하고 있다.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경찰 신분으로 보도연맹에 가입해 좌익 활동을 하던 형을 집단 처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동생의 비극적 운명을 그려내고 있다. 사실적 재현을 한 무대 장치가 눈에 띄었고 그 배경을 통해 극적인 공간(영규의 가옥, 10월 폭동 현장, 백천동 친정 가는 길, 경산 코발트 광산)을 그려내며 가족과 형제의 시대의 비극을 담아내고 있다. 역사의 소환은 재현과 사건의 재구성으로만 설득되기 어렵다. 과거사 진상 조사를 통해서도 묻혀 가는 역사를 소환해 동시대로 향하는 메시지가 불투명하게 전달된다. 전체 이야기로 담아내니 아픔도 형제의 비극도 코발트 광산의 학살 사건도 그 역사적 비극이 힘 있게 타격되질 못했다. 무대 장치의 시대성을 오늘날로 뚫어내지 못했으면서도 지역의 역사성을 재구성해 희곡으로 담아내려는 의지가 매우 반갑고 배우들이 이야기의 살점을 조화롭게 만들어가려는 장면들에서는 그 마음이 느껴진다.

<시간을 묻다>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 징용됐다가 패전 소련군 포로가 된 조선 청년들의 이야기를 역사의 시간으로 묻고 있는 작품이다. 당시 일본군 57만 명과 강제로 징병된 조선 청년 1만여 명이 시베리아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포로수용소에서 강제 노역을 하면서도 일본인도 조선인도 될 수 없이 청년들을 받아줄 나라가 없었고 이들은 남과 북으로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갔고 다시 한국전쟁이 반발하면서 운명도 좌·우로 갈라져야 했다. 월남한 시베리아 포로수용소 조선인 청년 중에는 한국전쟁 당시 전재민수용소로 이송되어 고된 사상점검을 받아야 했다. <시간을 묻다>는 일제강점기와 분단, 냉전의 시대에서 국가의 선택을 받을 수 없어 이념의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조선 청년들이 이야기다. 시베리아에 강제 억류되었다가 귀환한 생존자 고 이규철 씨의 시베리아 포로 생활과 귀국 과정을 기록한 ‘시베리아 한의 노래’를 펼쳐 놓은 듯해 보이고 극 중 인물 이철규(이광희 분)을 비롯해 마지막 생존자 6명의 이야기를 현재 시점에서 1945년 조선 청년들이 일본군이 되어 만주 관동군 이야기부터 시베리아 수용소, 한국전쟁, 전재민수용소와 시베리아 포로수용소 당시 일본군으로 함께 참전한 마사키 겐지(김병진 분)의 아들이 보내온 편지까지를 담아내고 있다.
아들을 통해 마사키 겐지는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서 일본군으로 함께 보낸 조선인 청년들을 향해 화해와 용서를 보내고 있다. 시계방을 운영하며 일본에서 살아가던 마사키는 일본 정부로부터 보상과 화해를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조선인 청년들을 그리워하며 재산 5만 엔을 위로금으로 전달한다는 유언까지다. 무대는 한 폭의 역사의 흐름을 재현하고 조선인 청년들을 투영해 시대의 역사와 그 시간들을 묻고 있다. 작품은 담백하면서도 시간의 흐름을 연대순으로 현재-과거-현재 순으로 다큐적인 장면으로 나열해 특정적인 장면들이 부각되지 못했다. 노년이 되어 생존해 살아가는 조선인 청년의 아픔이 크게 와 닿지 못한 것이 아쉬웠으면서도 2시간 가까이 무대를 끌고 가는 담백함이 보였다. 특히 이광희가 무대의 중심을 잡고 끌고 가는 연기로 최종 심사에서도 최우수연기상에 추천이 되었음에도 아쉽게도 수상을 하지 못했는데 역량이 좋은 배우다. 이경자(콩점이 분)도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와 연륜이 보이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어서, 용단을 내리소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으로 영조의 결정이 모호해진다. 이들 눈치를 보며 자신의 태생적인 출신과 경종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던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당쟁에서도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왕권을 유지했다. 신하의 양팔을 잡고 왕위를 자키며 장수한 영조의 이야기로 극단 처용의 <용단>은 영조의 시각으로 사관의 역사를 연극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창작 작품이다. 작품은 경종과 영조시대까지를 담아내고 있는데 노론과 소론의 분당과 대립, 경조의 죽음,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거치면서 사관(史官)의 역사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영조 시각으로 기록된 사관(史觀)은 마지막 장면에서 극 중 인물 사관(임윤경 분)에 의해 버려지면서 극을 끝내고 있다. 무대는 영조의 시선으로 기록되는 역사의 시간을 마주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조실록을 펼치면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된다. 이번 작품에서 연출은 노론과 소론 신하들 얼굴 위로 가면을 씌워 왕과 서민의 삶보다는 개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세 작품은 올해 대구연극제 초연작품이거나 지역 공연에서 검증 과정을 거쳐 재 공연된 작품이라는 점과 신진 작가와 연출이 작품에 애정을 가지고 소재를 개발해 희곡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작가 발굴을 통해 창작극을 개발하겠다는 대구연극제의 의지로 느껴졌고 이러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 올해 연극제의 특징이다. 역사를 소환하는 무대가 연극적 재현성과 극의 연대기적 미학성에만 치중된 것 같다. 역사의 시간을 담아내는 양을 덜어내고 날카로운 역사성이 포개질 수 있도록 특정 사건과 삶을 중심으로 전달되었다면 어떨까.
| 애환과 삶, 업보(業報)를 지나 무녀의 이야기 <신내>, <갯골의 여자들>, <무녀도>
변화 가운데 무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우선 이송희 레파토리 <신내>(작 한은정, 연출 이동학)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무당(무녀)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데 작가의 초연 작품이다. 극 중 인물 신내(이나경 분)는 무당인 어머니(하순남 분)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신주단지를 모시고 살아가야 하는 무녀 (巫女) 운명이다. 신내의 어머니도 딸까지 무당 팔자로 살게 할 수 없어 당집을 불태우고 남편과 죽으면서 무당 팔자를 끊는다. 불길에도 남겨진 신주단지는 업보(業報)로 2대에 걸쳐 신내는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된다. 이 작품이 특이한 건, 무당이 된 모녀의 삶이 딸 해라(김정연 분) 한테도 내려가는데 신내는 딸한테까지 무당의 업보를 거부하고 어머니와 같이 당집을 불태우고 신주단지를 깨고 운명을 거부한다. 신내 주변을 떠돌던 귀신은 사라지고 결혼 전 신병을 앓던 해라도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3대에 걸친 무당의 업보를 프롤로그에서 양식화된 장면으로 표현하며 무당의 업을 거부 할 수 없는 모녀의 기구한 가족사를 환기해 극적인 긴장감을 주면서도 인물의 설정과 극 구성이 다소 작위적이다. 기구한 무당의 운명과 삶에 동화되기에는 설득력이 빈약하다. 무당의 팔자와 운명을 거부하는 신내는 처녀 시절 동네 오빠(이송희 분, 용기 아빠)와 결혼을 약속하면서도 무당 팔자로 아내의 연을 만들지 못한다. 딸 해라는 신내가 과거에 결혼을 약속한 용기 아빠의 아들(용기, 장영준 분)과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가 되면서 인간의 인연과 업보(業報)로 바라보는 식이다. 또한, 신내와 용기 아빠의 과거-현재, 용기와 헤라의 현재, 신내의 어머니와 아버지 무당의 업과 가족사들을 시공간을 넘으며 장면들을 이루어 내고 있으나 특히 신내와 용기 아빠의 과거 시절(군대)의 장면들에서 타 장면들과 병치될 수 없는 코미디 적 요소를 과하게 전달시키면서 극의 무게감을 저하시켰다. 인연과 업보로 이어지는 극 중 인물들의 설정 중에 해라-용기, 신내-용기 아빠의 설정들을 보완해 구성해 보면 어떨까. 3대에 걸친 무당의 이야기만으로도 극은 넘친다.
극단 한울림의 <무녀도>는 김동리 소설원작을 백광현(극작, 연출)로 풀어내는 작품이다. 소설 원작의 원형을 수용하면서도 모화(이지영 분)와 아들 욱이(이원희 분)를 무속신앙과 종교적인 갈등으로만 부각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욱이는 “어머니를 구원해 주옵소서. 아멘”을 외치고 모화는 “잡귀신아 물러가라”며 예수 귀신이 들었다며 신칼로 아들 가슴을 난도질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마치 무녀인 모화와 아들을 종교적인 갈등으로만 보여진다. 무녀의 이기적인 욕망으로써 행위만 보이고 모화 또한 자신의 목을 베어버린다. 운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무녀의 삶과 종교에 심취한 아들이 고뇌하는 인간적인 내면과 갈등이 죽음과 삶으로 포개지지 않아 시대에 변화되는 무속 신앙과 욱이가 신봉하는 기독교가 대립해 결국 비극적인 죽음에 이른다는 결말로 전달되었다. 고뇌하는 아픔과 삶은 실종되었고 소설의 비극적 충격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번 작품에서는 이지영의 연기(모화 역)가 돋보였고 욱이(이원희 분 )도 배우의 발전적인 가능성을 보였다. 특히 이지영은 배우 출신으로 제37회 대구연극제 <맛있는 새 닭>을 연출하면서 대상을 수상해 신선한 평가가 받았다.

극단 온누리 <갯골의 여자들>(김광탁 작, 이국희 연출)는 무대 미학으로 무대를 채워가면서 이미지화 하고 다양한 오브제 설정으로 연극적인 은유와 시각화를 보여준 수작이었고 배우들 앙상블과 연기로 무대를 채워다. <갯골의 여자들>은 3대에 걸친 여인들의 애환과 삶을 그려내면서 갯골에 묻혀 죽음을 맞이하는 할머니(신숙희 분)의 이야기다. 이국희는 작품의 도입부터 공간의 미학성을 들어낸다. 프롤로그는 갯골여자들 삶을 설화적인 모티브처럼 그려진다. 갯골의 바다는 현대적인 막으로 둘러치고 막 뒤로 동화그림자극처럼 투사해 갯골 진흙 바다에서 바지락을 캐며 살아가는 <갯골의 여자들>의 애환을 그려내고 있다. 연출은 공간 구조를 미니멀 하면서도 무대 배경의 전경의 시각이 연극적인 미학성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거추장스러운 구조는 걷어냈는데 대형으로 둘러싸인 천막은 때로는 바다로, 일몰과 일출로 흔들거리는 갯골로, 할머니의 죽음을 그려내는 바닷물로 그려진다.
특히 갯골의 바다에서 그물을 이어 쳐 놓은 작은 그물장 고목나무 뼈대는 갯골 여자들의 삶과 애환의 닮음으로 그 여백을 살려냈고 일몰 바닷물이 차이는데도 평생 바지락을 깨던 진흙밭을 나갈 수 없어 끈으로 육신을 그물망에 묶고 죽음을 기다리는 할머니한테 아픔의 연민이 깊게 배어진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연출이 돋보이는 장면은 바닷물이 차오르면서 조용히 죽어가는 할머니의 죽음을 뒤편 대형 천이 일몰 바닷물이 들어오는 속도로 움직이면서 죽음을 은유하는 무대의 시각이미지를 극대화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 손녀 연이(남가설 분)한테 먹이려고 기르던 개를 김포댁(구진아 분)이 나서서 잡는 장면을 죽을 때까지 몽둥이로 쳐내는 장면을 오랜 시간 투사했는데 과하다. 텍스트의 흐름을 그대로 차용한다고 해도 이 장면을 특정적인 장치로 시각화함으로써 동물 학대 논란이 우려스러워지는 장면이다. 연출력이 이번 작품으로 돋보였음에도 작품 평가와 심사에서 의견들이 쏟아졌다. 이번 작품에서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였는데 할머니 신숙희, 김포댁 구진아, 연이역 남가설 등이 작품을 끌고 갔고 등장인물로 분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작품에 앙상블을 균형 있게 표현해 냈다.
| 권력과 디스토피아 미래사회 <반향>, <빙하기, 2042>
극단 헛짓의<반향>(작, 연출 김현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배우들이 연극으로 만들어가는 극중극 형식을 취하면서 한국 사회의 권력과 갈등, 분열로 대 통합이 실종된 오늘을 환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권력에 길든 동물들은 농장 주인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하며 농장 주인은 이들의 노동과 인간을 약탈하면서 절대적인 부를 약탈하고 위계적인 권력을 유지한다. 동물들은 인간다운 삶과 부의 평등한 세상을 위해 저항하고 농장을 차지한다. 농장을 차지한 동물도 절대적인 권력을 물화시키지 못하고 위계적인 권력으로 재편성 되어 복종한다. 평등한 세상, 양극화가 없는 국가는 구호일 뿐이며, 자유의 세상을 꿈꾸는 묵묵히 풍차를 건설하는 극 중 인물 복서(유이수 분)가 바라는 세상, 균열과 절대 권력이 없는 세상은 나폴레옹의 선동적인 혁명의 구호만이 맴돌고 연출은 이러한 세상을 해결할 수 없어 막을 내려 버린다.

이 작품을 연출한 김현규(39) 연출이 지난해 39회 대한민국연극제 40세 이하 네트워킹 페스티발에서 작연출한 <혜영에게>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청년 세대들의 사랑을 담백하게 그려내 작품으로 극단 헛짓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고 올해 대구연극제에서 <반향>으로 대상을 수상하면서 앞으로 기대되는 연출가로 성장하고 있다. 무대는 존스(박세기 분)와 나폴레옹(조영근 분)이 만나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연극으로 올리자며 극이 시작된다. 나폴레옹은 ‘기성세대의 혁명’으로 연극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존스는 동물농장이 “동물들이 혁명을 일으키듯이 우리도 혁명을 일으킬 겁니다. 수준 떨어지는 연극, 주제 의식도 없는 대본, 납품하듯 입맛에 맞게 찍어내는 관제 공연, 그것뿐이에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관행. 잃어버린 예술의 순수성을 되찾기 위해 혁명을 선호합니다.”
극은 농장 주인 존스와 독재자인 나폴레옹(동물)이 만나 동물농장 연극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특이한 점은 이 극은 ‘기성세대 연극 질서에 저항하는 혁명적인 연극’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이다. 젊은 연극인들이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무대를 향한 갈증과 도전적인 정신으로 이 연극을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희곡으로 박제된 재현 연극에서 무대를 역동적으로 생산하고 표현 할 수 있는 탈 연극의 무대를 갈망하는 것처럼 고민은 무대로 드러난다. 재현 방식의 무대 구조를 걷어내고 단조로우면서도 좌측 후면으로 종이박스를 세워 동물 농장의 전경을 들어내고 박스는 풍차를 건설하는데 오브제로 변주되기도 한다. 배우들은 누런 종이 봉투로 가면을 형상화해 획일화 된 이미지를 그려내고 동물들의 유일한 생존 막대 도구는 생산의 도구로, 획일화 된 노동자의 움직임으로 인간 권력에 저항하는 도구로 장면의 이미지를 역동적으로 구축하면서 동물과 인간들의 움직임들을 양식화시켜 연극적 움직임의 이미지로 그려내며 극을 이끌어 가는 탄력이 돋보였다. 장점은 무대가 거칠면서도 강한 연극성을 드러내려는 연출의 시선이 반갑고 극을 몰고 가는 장면의 앙상블과 템포들이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공격적인 무대를 마치 기성세대 연극에 도전적으로 이 작품을 통해 무언의 시위(연극의 혁명)를 진지한 갈증을 들어내 보인다.
연극을 고민하는 극단 헛짓의 태도에 기대가 되면서도 존슨과 나폴레옹이 극에서 빠져나와 동물 농장의 극 중 극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장면과 공간 구분과 이들의 내면의 심리가 드러나지 않았고 종이박스가 무대의 배경과 풍차 건설의 오브제로 변환되는 과정도 어수선했다. 마지막 장면은 나폴레옹의 선동적인 언어로 극을 끝내고 막을 내려 더 이상 꿈꾸는 세상(혁명)을 실현할 수 없어 끝을 끝내는데 동물도 인간도 절대적인 권력 앞에서는 자유로운 세상, 자유 혁명을 꿈꿀 수 없는 좌절인지, 존슨 말대로 혁명적인 연극의 방식인지 모호하다. 이번 헛짓의 <반향>의 의도를 이해하면서도 무대로 드러난 몇 가지 점들이 정리가 안 되고 있다.
우선 기성세대 연극에 도전하는 혁명적? 연극을 만들기 위한 젊은 연극인들의 메시지로 동물 농장을 차용한 것인지, 부패 권력의 풍자인지, 재현적 텍스트의 언어에 탈피해 극단의 무대 언어로 그려내려는 시선이지 이 작품은 다중적으로 포개져 있어 무대를 향하는 화촉은 날카로워 보였으나 방향성은 모호한 채로 끝났다. 이 작품을 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연출의 말대로 작품이 거칠고 투박해 보여도 연극적인 건강함들이 무대를 견인하고 있었고 그 가능성을 크게 평가해 세대 교체의 변화를 통해 미래 대구연극을 견인할 수 있는 동력을 기대해서다. 겸손하고 정진하길 바란다. 이번 작품을 통해 더 많은 공부가 되길 바라고 우려스러움을 넘어서지 못하면 연출도 시대의 절망과 좌절로 극으로 해결할 수 없어 끝낸 그것처럼 나폴레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길 바라고 이것을 넘지 못하면 신진 연출가들의 의욕으로만 비쳐질 수 있다.

극단 고도의 <빙하기, 2042> (작 선욱현 연출 이현진)는 미래 빙하기 시대의 가상현실도 빙하기 인간이 살기 위해 꿈꾸는 지하 세계도 여전히 인간의 살점을 뜯고 죽이는 포악한 세상도 현실과 빙하기의 미래가 달라지지 않는 디스토피아적인 시대로 풍자했다. 배우들의 연기가 고루 돋보였고 연극적인 판타지가 아쉬웠으나 극을 밀도감 있게 끌고 가는 연출력이 보였다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대상 선정 작품으로 많은 논의가 되었음에도 신인 연기상 2명(최우정, 황현아)이 이 작품을 통해 선정되었다. 이번 39회 대구연극제는 역대 최다 작품들이 본선에 출품해 대구가 대명동 연극의 도시임을 실감케 했고 작품들이 아쉬우면서도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희곡의 언어보다는 연출이 시선이 필요한 작품이 있고, 연출의 시선이 드러나도 선명해야 할 무대가 있다. 무대를 애써 채우려고 하기보다는 덜어냈을 때 무대 언어와 시선이 도드라질 수 있다. 쏟아지는 말과 과한 사건의 배합과 인물들이 쏟아내는 말들이 많아지고 그것을 단단하게 무대로 묶을 수 없다면 ‘연극은 이런 것이야’라는 것은 시대에 묶여져 있는 박제된 연극이 되어 버린다. 연극적인 테크닉이 강하면 연극의 정직한 맛이 살아나지 못하고 무대를 배치하는 과도한 기술은 때로 연출의 시선이 가려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연극적인 혁명을 꿈꾸는 진취적인 연극 정신을 가진다 해도 그 모양이 투박하고 거칠기만 하면 감동과 공감을 주기 어렵다. 이번 연극제의 큰 수확은 신진 그룹과 중견 그룹들의 조화로운 연극무대였고 후배 연극인들이 거친 무대를 보인다 해도 무대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방식의 차이로 칭찬해 주고 기대해 주면 앞으로 대구연극은 지역을 넘어 탄탄한 초연작품들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도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대구는 실험과 도전이 필요할 때다. 발전적인 세대 교체의 징후가 되는 연극제가 되었길 바란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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