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21학번으로 고려대 경영대학에 입학한 박민혁(20)씨는 2년 전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표를 받아든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목표보다 낮은 등급이 찍힌 성적표를 보고 그는 바로 다음 날 집 근처 독서실로 향했다. “재수를 하려면 하루 2~3시간씩 앉아 있는 연습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해 서울의 다른 중상위권 대학 어문계열 학과에 합격했지만 그 대학엔 등록금만 내고 수업을 듣지 않았다. 대학의 중간·기말고사 기간 그는 서울 대치동 단과학원과 집 근처인 경기도 부천의 독학재수학원에서 수능 문제를 풀었다. 결국 2021학년도 정시 전형으로 고려대에 합격했다. 처음에는 기뻤으나 곧 ‘3수’ 욕구가 마음속에서 올라왔다고 한다. “서울대생도 취업이 힘든데 비서울대생은 더 힘들지 않겠나 생각했어요. ‘조금만 더 하면 서울대나 한의대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죠.” 대학을 다니면서 3수는 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는 ‘재필삼선’(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이란 말이 요즘 시대에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학 타이틀 쥐고 20대에 진입하는 건 전혀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입시를 두 번 이상 치르는 재수생이 늘고 있다. 오는 18일 치러지는 2022학년도 수능에 응시원서를 접수한 수험생의 29.2%(14만9111명)가 고교 졸업생(검정고시 포함)이다. 학령인구가 줄고 있어 숫자 자체는 크게 늘어나지 않지만 응시생 중 재수생 비중은 증가 추세다. 2019학년도에는 24.7%(14만6813명)가 재수생이었다. 2010학년도에는 그 비율이 21.5%였다.

재수생 증가 이유로 취업난과 학벌주의 등이 지목되지만 교육계는 교육부가 2019년 11월 발표한 ‘대입 공정성 강화 방안’을 주목한다. 그해 가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 민씨가 부모 도움으로 입시에 유리한 ‘스펙’을 쌓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입시 제도 공정성 논란이 일었다. 교육부는 그러자 서울 소재 16개 대학의 수능 위주 정시 전형을 2023학년도부터 40% 이상으로 확대하는 입시제도 개편안을 발표했다.
수능은 시간을 투입해 문제를 많이 풀어본 사람, 즉 재수생이 유리한 시험이다. 따라서 고교 진학담당 교사 등 입시 전문가들은 수능 전형 확대 메시지를 재수생 증가의 주요 원인으로 보고 있다. 서울 주요 대학은 이미 2022학년도 입시에서 정시 모집 선발 비중을 크게 올렸다. 고려대 서울시립대 등 9곳은 그 비중이 40%를 넘어섰다. ‘정시 선발 40%’가 완성되는 내년(2023학년도) 입시부터는 재수생 비중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조국 사태’로 인한 입시제도 변화가 재수생 증가라는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서울 강남의 한 고교를 지난 2월 졸업한 송주영(19)양은 독학재수학원을 다니며 수능을 준비하고 있다. 송양이 목표로 하는 곳은 경희대 경영학과다. 이 학과의 2021학년도 정시 모집인원은 88명이었으나 2022학년도에 102명으로 늘었다. 국민일보 취재팀이 송양에게 ‘정시 비중이 늘어난 게 재수를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느냐’고 묻자 그는 “확실히 그렇다”고 답했다. 이어 “수험생 입장에서 정시 비중 확대는 대학 가는 길이 넓어진다는 의미이니 그 길을 택하는 학생이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박민혁씨가 입학한 고려대 경영대학도 올해 정시 일반전형 선발인원이 97명으로 지난해 44명에 비해 2배 이상이다. 박씨와 같은 재수생이 합격할 확률이 훨씬 커진 것이다.
의대 정시 합격자 80%는 재수생
정시에서 재수생이 유리한 것은 입시 결과로 증명된다. 인기가 높은 각 대학 의대는 재수생 합격자 비율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취재팀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7개 대학(가천대 경북대 경희대 아주대 울산대 인하대 한림대) 의대의 2019~2021학년도 정시 전형 합격자 정보를 입수했다. 분석 결과 7개 의대의 최근 3년간 정시 합격자 500명 가운데 80.6%(403명)가 재수생이었다. 주목할 점은 재수생 합격자 비율이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진다는 것이다. 2019학년도 71.7%, 2020학년도 84.6%, 2021학년도 85.8%였다. 울산대 의대의 경우 2020·2021학년도 정시 합격자 각 10명이 모두 재수생이었다. 합격자의 재수 연차 정보를 제공한 한림대의 경우 3년간 정시 합격자 144명 중 7.6%(11명)가 4수~6수생이었다.
취재팀이 국회 열린민주당 강민정 의원실에 요청해 입수한 2021학년도 국립대 의대 합격자 현황도 양상이 비슷했다. 서울대 의대의 경우 정시모집 일반전형 합격자 30명 가운데 73.3%(22명)가 재수생이었다.
재수로 올해 서울의 한 의대에 입학한 심모(20)씨는 수능 위주의 정시 전형은 재수생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고3 친구들을 데려다가 고2 시험지를 풀게 하면 고3 친구들 성적이 더 잘 나올 거잖아요. 재수생이 유리한 건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다보니 의대에 합격하고 나서도 최상위권 대학 의대 진학을 위해 또다시 재수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심씨는 “우리 과에서도 반수하는 친구들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앞으로 재수는 고교 4학년을 다니는 것처럼 보편적인 현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재수 기회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느냐다. 그렇지 않다면 또 다른 공정성 시비가 불거질 수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2021학년도 수능 응시원서를 제출한 재수생 14만6761명 중 9만1047명(62.04%)이 서울·경기 지역 수험생이었다. 서울은 수능 지원자 10만6444명 중 4만4184명(41.5%)이, 경기도는 수능 지원자 13만7690명 중 4만6863명(34%)이 재수생이었다.
누가 재수를 하는지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는 고교의 대학 진학률 통계다. 대학 진학률이 낮을수록 고교 졸업자들이 재수를 많이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종로학원하늘교육에 따르면 2021학년도 일반계 고교 대학진학률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곳은 서울(66.0%)이었다. 서울 중에서도 서초구(55.2%)와 강남구(56.4%)의 고교 진학률이 특히 낮았다. 이곳 학생들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을 때 재수를 선택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자퇴하고 수능 본다’ 수험생도 증가

서울 강남에서는 수능을 치르기 전부터 재수를 결정한 고3 학생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강남구 한 고교 3학년생인 유모(19)양은 이번 수능은 문과로 치르고 내년에는 이과로 바꿔 수능을 볼 생각이다. 올해 대학 몇 곳에 지원을 했지만 붙어도 갈 생각은 없다. 진로를 놓고 고민하다 최근 수의학과로 목표를 정했기 때문이다. “국어를 좋아해서 국어교육과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교사를 별로 안 뽑잖아요. 어차피 최종 목표는 직업을 갖는 것인데 나중에 취업할 때 고생하기 싫어서 처음부터 안정적으로 수의학과를 가려고요.”
최근에는 고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수능을 준비하는 학생도 늘고 있다. 검정고시생 수능 응시접수율은 2019학년도 1.9%(1만1331명)에서 2022학년도 2.8%(1만4277명)로 증가했다. 경기도 한 고교 교사는 “대학의 정시 선발 비율 증가로 학교에 다니기보다 학원에서 수능에 매진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면서 자퇴하는 학생이 늘었다”며 “현재 학교에 남아 있을 이유가 있는 학생은 학생부 교과나 학생부 종합전형을 준비하는 학생들뿐”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이름난 자율형사립고나 외국어고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선행재수’를 택하는 경우도 있다.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국장은 “자사고·외고·국제고에 합격하자마자 자퇴하고 재수하는 학생이 늘고 있다”며 “고교의 학벌 후광을 얻은 뒤 곧바로 수능에 올인하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교육 전문가들은 재수생이 증가하는 건 사회적 비용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재수생 중 상당수는 대학에 등록금을 내 ‘적’을 두고 대입을 준비하는 반수생이다. 반수생 추정 인원은 2019학년도 7만명대에서 2021학년도부터 8만명대로 뛰었다. 종로학원하늘교육은 본수능 재수생 응시인원에서 6월 모의고사 재수생 응시인원을 빼는 방식으로 반수생 규모를 추정하고 있다. 6월은 대학 중간고사 기간으로 통상 반수생은 6월 모의고사를 응시하지 않는다. 이들 반수생이 포기한 대학 등록금과 수업료만 해도 상당한 규모가 될 것으로 추산된다.
구 정책국장은 “수능 점수로 승부를 보는 구조에서 재수생 증가 현상은 필연적이며 국가적으로는 엄청난 낭비”라고 강조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학생들이 재수를 택하면서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은 만만치 않다”며 “이를 감수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학생들만 뛰어드는, 즉 ‘재수도 돈이 있어야 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슈&탐사팀 권기석 박세원 이동환 권민지 기자 o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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