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드라마 ‘D.P.’는 하이퍼리얼리즘(극단적 사실주의)을 표방한다. 드라마는 군대 내 가혹 행위와 강압적인 상명하복 문화 등 각종 부조리에 주목했다. 그래서 작품에 등장하는 탈영병 상당수는 조직 내 부조리와 이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상관들, 가정문제까지 복합적 상황이 맞물려 탈영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를 본 군필자들은 “완벽한 고증”이라며 열광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탈영병이 폭력과 가혹 행위를 견디다 못해 마지막 수단으로 탈영을 택한다. 대체로 탈영은 우발적이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일어난다. 궁지에 몰린 그들은 “최악 속에서 택한 최선”이라고 항변한다. 육군 헌병대 출신 기자가 복무 시절 목격한 탈영병들도 그랬다.
기자의 실제 경험과 군무이탈체포조(DP) 예비역들의 제보 중 몇 가지 일화를 전한다. 기사 내용은 다양한 사례를 모아 공통부분을 추려낸 것으로 소속 부대, 복무 시기별로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탈영병 등 여러 실사례를 담은 만큼 모든 등장인물은 당사자를 특정할 수 없도록 가명으로 처리했다.
탈영 생활 ‘13년’… 02 군번 일병의 자수

“2003년에 탈영했는데 자수하려고 합니다.”
2016년 2월의 어느 날 오후. 까맣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남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경계를 서는 위병 근무병들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자신을 탈영병이라고 소개했다. 꽤 다부진 몸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수사과에 인계되고 3시간쯤 후 그의 어머니와 형이 찾아왔다. 경기도 안산에 산다고 했으니 연락을 받자마자 곧장 출발한 듯했다. 환갑이 다 된 듯 보이는 강씨의 어머니는 조사실에 들어서자마자 목메는 소리로 아들을 찾았다. “혁승아, 혁승아….”
강혁승씨가 가족과 만난 건 2002년 입대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모자간 재회까지 14년이 걸린 셈이다. 탈영병이 발생하면 여자친구, 가족, 친척, 지인 순으로 탐문을 벌인다. 강씨 역시 이를 의식한 듯, 탈영 후 단 한 번도 집을 찾지 않았다고 했다.
14년이 흘렀지만 강씨의 집 주소는 입대 당시 그대로였다. 그의 어머니는 “우리 아들 집에 오고 싶은데 (이사하면) 못 찾아올까 봐”라며 다시 한번 흐느꼈다. ‘017’로 시작하는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인 듯했다.
강씨는 입대 이듬해인 2003년 탈영병 신분이 됐다. 탈영 순간 복무 기간이 중단되면서 진급도 멈춘다. 서른 중반의 나이에도 강씨는 13년 전 탈영 그때와 마찬가지로 일병이었다.
신원조회 결과 이전에 한 번의 탈영 전력이 더 발견됐다. 2002년 시도했던 그의 첫 번째 탈영은 부대 밖으로 나서자마자 곧장 발각돼 미수에 그쳤다. 강씨는 “간부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나서 만창(영창 15일)을 다녀왔다”며 “몇 달 후 휴가를 나왔다 부대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탈영 후 어떻게 지냈냐는 수사관의 물음에 강씨는 지난 13년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그는 탈영 직후 부산으로 내려가 한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로 도피 생활의 첫발을 뗐다. 이후 이곳저곳 공사장을 찾아다니며 막노동을 전전하다 원양어선을 3년씩 두 번, 총 6년을 탔다고 했다. 배에서 내린 뒤에는 유흥업소 아가씨(접대 여성)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고 했다. 잠잠히 그의 얘기를 들은 수사관은 “세상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뭐 없었겠지”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를 두 번이나 탈영을 감행하도록 내몰았던 건 다름 아니라 엽기적인 가혹 행위였다. 강씨는 “내성적인 성격 탓에 전입 초기부터 선임들의 괴롭힘이 시작됐다”고 했다. 관내 간부들의 차량 번호를 다 외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작된 폭행의 강도는 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변소를 혓바닥으로 핥게 했고, 잠자는 그의 얼굴에 소변을 보기도 했다. 그는 “세탁실로 끌려가 폭행당하는 건 일상이었다”고도 했다.
물리적·언어적 성희롱 역시 다반사였다. 강제로 음모를 면도하게 시켰고, 청소를 만족스럽게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후임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강요받기도 했다.
조직적이고 집요한 가혹 행위를 견디다 못한 그는 결국 휴가를 나왔다 다시 부대로 돌아가지 않는 길을 택했다. 강씨는 “새우배(원양어선) 생활도 무척 고됐지만, 군대보다는 훨씬 행복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가 13년 만에 자수한 이유는 황반변성을 앓던 오른쪽 눈 때문이었다. 강씨는 자신의 눈이 실명 직전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는 “눈이 지금처럼 망가질 때까지 병원 문턱 한번 가보지 못했다”며 “너무 힘들어서 지금이라도 자수하고 원래 삶을 찾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가족한테 죄스럽다는 마음도 전했다. 조사과정에서 그가 처음 눈물을 보인 것도 그때였다. 강씨는 “다시 없을 불효를 저질렀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살면서 어머니께 속죄하고 싶다”고 울먹였다.
“살려 달라”고 했던 탈영병, 11년 전의 악몽
09군번 김재훈씨에게 탈영병 송민수씨는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살려 달라”는 그의 외침은 12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악몽으로 재현되는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김씨는 “만약 그때 그분(탈영병)이 기사를 통해 이 인터뷰를 본다면 미안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고 전했다.송씨 체포에 나선 건 김씨가 DP 사수로 올라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때 김씨는 직접 열댓 명의 탈영병을 체포해 본 나름의 베테랑 DP였다. 송씨는 휴가를 나간 이후 연락이 두절된 채 잠적한 상태라고 했다.
그랬던 송씨의 흔적은 금세 발견됐다. 주소지 인근 은행 자동화기기(ATM)에서 현금을 찾은 기록이 입수된 것이다. 추적을 피하려는 생각으로 카드를 쓰지 않기 위한 행동으로 보였다. 결국 ATM 근처 피시방을 수색하던 중 송씨를 찾을 수 있었다.
김씨는 “헌병대라는 말에 눈물을 흘리며 손까지 비벼가며 한 번만 살려 달라고 애원하더라”라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살려 달라는 말에서 분명히 심한 가혹 행위를 당했겠거니 생각했다. 친동생 생각이 나 더 마음이 아팠다”라며 “부대로 돌아가는 내내 쭈그려 앉아 사시나무 떨듯 계속 바들바들 떨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의 예상대로 송씨는 이후 조사과정에서 선임들의 심한 구타에 못 이겨 탈영을 결심했다고 진술했다. 신병 시절 생활관 고참에게 밉보인 후 폭행, 폭언과 협박을 당했다고 했다.
김씨는 “스무 명 정도 탈영병을 잡았지만 가장 가슴 아팠던 사례”라며 “군인으로서, DP로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만큼 당시엔 그를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오래전 일이지만 그가 무사히 군 생활을 끝마쳤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국가가 나를 버렸다” 어느 여군 하사의 탈영
많은 탈영병이 부조리와 조직적인 폭력을 견디다 못해 탈영을 결심한다. 드물지만 간부의 탈영사례도 있다.
2014년 여군 하사 김미정씨는 장기복무 심사에서 탈락한 것에 불복했다. 그는 휴가 복귀를 거부하고 모교인 부산의 한 대학교 앞에서 1위 시위에 나섰다. 그는 성과가 심사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항변하며 “국가가 나를 이용만 하고 버렸다”고 주장했다.
휴가 후 미복귀로 신고가 접수됐고, 김씨는 곧바로 강원도 모 전방부대에서 출동한 DP에 의해 수사과로 호송됐다.
탈영병들이 군대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는 심각하면서도 다양하다. 하지만 차마 웃지 못할 사례도 있다. 2015년 1년여간 DP 임무를 수행한 박준혁씨는 “정말 웃긴 놈이 있었다”라고 자신이 겪었던 탈영병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일병이었던 조승민씨는 4박5일 휴가를 나갔다. ‘마블스튜디오’의 열혈 팬이었던 그는 영화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개봉 일자를 맞춰 휴가 계획을 짰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4월 23일인 영화 개봉일을 20일로 착각해 휴가계를 21일 복귀로 제출한 것이다. 고민하던 조씨는 결국 탈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휴대전화를 꺼 놓은 채 부대로 복귀하지 않고 잠적했다. 결국 연락이 되지 않던 담당 부대에서 탈영 신고가 접수됐고, 곧장 DP조가 조씨를 체포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복귀 예정일을 하루 넘긴 4월 22일 자택에서 체포됐다. 탈영한 이유였던 영화도 보지 못했다. 조씨는 “정말 영화만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고 한다.

기사에 담기지 못한 이야기를 제보받습니다. DP에 관한 각종 일화와 군대 내 폭행·가혹 행위, 상급자에 의한 성추행 등 여전히 남아있는 각종 부조리에 대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
[D.P 기자가 전하는 ‘진짜’ D.P 이야기]
▶①“잘생긴 탈영병, 시민이 감싸기도…” 진짜 D.P. 추적기
▶③‘키도 시력도 아님’ 탈영병 잡는 D.P. 선발 필수조건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
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