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무가 안은미는 단 한 번 만나더라도 결코 잊히지 않는다. 트레이드마크인 빡빡머리와 알록달록 무늬의 오색찬란한 의상은 그가 어디에 있든 존재감을 마구 발산하기 때문이다. 그의 춤도 마찬가지다. 그는 관습의 틀을 깨는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춤으로 한국 현대무용계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각인했다. 할머니들의 막춤으로 몸의 인류학적 보고서라는 평가를 받은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2011년 초연)가 2014년 프랑스 파리여름축제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전 세계 50개 가까운 극장 및 축제의 초청을 받는 등 그의 작품들은 한국을 넘어 해외 관객까지 사로잡았다. 현대 공연예술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 시립극장(테아트르 드 라빌)이 2018년 한국 출신 예술가로는 처음 그를 상주예술가로 위촉했을 정도다.
“코로나 시대 춤은 공동체의 가치 알려줘”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안은미컴퍼니의 해외 투어도 취소 혹은 연기됐다. 예상하지 못한 타격이었지만 그는 국내에서 부지런히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굵직한 것만 봐도 인기 레퍼토리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올해 6월 국제현대무용제에서 선보이는가 하면 지난해 11월 20주년 맞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의뢰로 축하의 의미를 담은 신작 ‘나는 스무살입니다’와 올해 3월 아시아의 밀레니얼 세대를 주제로 한 신작 ‘드래곤즈(Dragons)’를 공연한 것은 대표적이다. 여기에 그는 지금까지 만든 150여 편 가운데 근래 국내외에서 주목받은 4편을 잇달아 선보이는 ‘안은미컴퍼니 4괘-용 이름 거시기 조상님’을 기획했다. 안은미컴퍼니가 상주단체로 있는 영등포아트홀에서 ‘드래곤즈’ ‘렛 미 체인지 유어 네임(Let Me Change Your Name)!’ ‘거시기 모놀로그’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가 오는 28~29일과 9월 4~5일 차례대로 무대에 오른다. 안은미컴퍼니 페스티벌을 표방한 4괘 공연은 아카이빙을 위한 영상 촬영도 함께 이뤄진다. 코로나 시국에 만만치 않은 프로젝트를 앞두고 연습이 한창인 안은미를 만났다.
“코로나로 힘들다고 가만히 있는 건 작가가 아니죠. 작가는 언제나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예술이 고단한 작업이지만 나 같은 사람에겐 춤추는 게 오히려 휴식이자 활력을 줘요. 그리고 팬데믹을 해결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들이잖아요. 협업으로 이뤄지는 춤은 공동체의 가치를 새삼 알려준다고 봐요.”

‘드래곤즈’와 ‘렛 미 체인지 유어 네임’ 그리고 아시아
지난 18일 서울 보광동에 있는 안은미컴퍼니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특유의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며 이번 4괘 공연에 대해 설명했다. 첫 번째 작품인 ‘드래곤즈’는 그의 가장 최신작으로 아시아에서 모바일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2000년대에 태어나고 성장한 ‘Z세대’ 무용수들이 함께한 작품이다. 최근 극장을 다시 연 유럽에서 초청하고 싶다는 연락이 많다.
“2018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페스티벌에 ‘렛 미 체인지 유어 네임’으로 초청받은 적이 있어요. 그때 인도네시아의 춤 유산에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서 살펴보니 아시아는 다양한 춤 유산으로 넘치는 보물창고더라고요. 게다가 현재 아시아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높은 상태고요.”
하지만 ‘드래곤즈’는 코로나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태어나게 됐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일본, 대만에서 뽑은 5명의 무용수가 한국에 올 수 없게 되면서 줌(zoom)으로 연습을 지도한 뒤 실제 공연에 홀로그램으로 출연하는 형태가 됐다.
“아시아 무용수들이 우리 무용단에 합류할 계획이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줌으로 연습을 지도하고 인스타그램에 서로의 연습 영상을 공유하는 등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어요. 또 아시아 무용수들이 각각 몸 치수를 재면 한국에서 거기에 맞춰 무대의상을 만들어 보내기도 했고요. 아이러니하게도 ‘드래곤즈’의 주제와 작업방식에 대한 해외 무용계의 관심이 높아서 이번 9월 중순부터 벨기에 프랑스 독일 룩셈부르크 등 유럽 투어가 잡혔습니다. 안은미컴퍼니는 한국의 예술단체 가운데 코로나 이후 해외 투어에 나서는 첫 단체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안은미컴퍼니 페스티벌의 두 번째 작품인 ‘렛 미 체인지 유어 네임’은 안은미가 2005년 베를린에서 초연한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꾸준히 해외에서 초청받고 있다. 세트 없이 무용수의 몸짓으로만 이뤄진 작품으로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육체가 충돌하고 어우러지는 화합을 그렸다. 원래 한국 무용수와 서양 무용수가 출연했지만, 이번에는 안은미컴퍼니 단원들이 재연한다. 안은미는 “대구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을 마친 뒤 안무가 피나 바우쉬 초청으로 독일 폴크방 타츠스튜디오 무용단 객원 안무를 맡았을 때 ‘렛 미 체인지 유어 네임’을 만들었다”면서 “그동안 150여편을 안무했는데, 이 작품이 현재 해외 축제와 공연장의 초청을 받는 작품들 가운데 가장 오래 됐다. 한마디로 내 ‘최장수 베이비’다”고 웃었다.
‘탄츠테아터의 거장’으로 불리며 현대무용의 역사를 새로 쓴 피나 바우쉬는 안은미를 좋아해서 2002년부터 그가 주최하는 페스티벌에 자주 초청했었다. 안은미는 ‘렛츠’ 시리즈와 ‘플리즈’ 시리즈 그리고 ‘심포카 바리-이승편’를 잇따라 선보였는데, 유럽 공연계의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됐다. 안은미는 “마사 그레이엄, 머스 커닝햄 등 여러 거장의 자취에서 위대함을 느꼈지만 피나 바우쉬는 내게 특별했다. (2000년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한국 공연을 계기로 친분을 쌓은) 피나는 나를 정말 예뻐해 줬고, 나 역시 그녀를 만날 때마다 다양한 한국 문화를 경험하게 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면서 “피나가 2009년 (암으로) 타계했을 때는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슬펐다. 10년간 그녀와의 교류는 인간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내게 큰 자양분이 됐다”고 설명했다.
‘거시기 모놀로그’와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그리고 할머니의 몸

안은미컴퍼니 페스티벌이 세 번째로 관객과 만나는 작품은 2019년 초연된 ‘거시기 모놀로그’. 이 작품은 수치와 부끄러움의 감각으로만 남아있는 할머니들의 첫 경험을 소재로 했다. 한국의 여성들은 21세기에도 성(性)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이 작품은 60~90대 여성들의 첫 경험 고백을 무용수들의 몸짓과 함께 풀어냄으로써 ‘몸의 잔혹사’를 끊어내고자 한다.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통해 노년의 몸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됐는데요. 우리 할머니들의 몸에는 사회적인 터부 등이 각인돼 있는데, 성(性)은 대표적입니다. 한국 여성들은 오랫동안 성에 대해 억압받아왔잖아요. 성(性)에 무지했던 할머니들은 젊은 시절의 첫 경험을 수치와 부끄러움으로만 기억하죠. 너무나 강렬하지만 힘들고 뭉개진 상태의 기억이라 언어로 제대로 표현 못 하세요. ‘거시기 모놀로그’는 신체 접촉에 대한 건강함이 부족한 사회, 추상적으로만 작동하는 성에 대한 어두운 인식 그리고 우리 사회의 터부에 대한 관념을 다뤘어요.”
페스티벌의 피날레는 안은미의 ‘무용 인류학 시리즈’의 첫 출발점이자 국내외에서 인기있는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가 맡았다. 안은미컴퍼니가 2011년 두산아트센터 상주단체 시절 제작한 이 작품은 전국을 돌며 만난 할머니들의 춤을 직접 기록하고 그 몸짓을 공연에 녹여냈다. 희한하게도 영상 속 할머니들의 춤은 비슷하다. 엉거주춤하게 서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두 팔을 살짝 좌우로 흔드는 형태다. 처음 보면 웃음을 자아내지만 점점 가슴이 묵직해진다. 논밭에서, 시장에서, 항구에서, 노인정에서 할머니들이 보여주는 서툴지만 정직한 춤은 고된 노동과 오랜 삶을 견뎌온 증거이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의 몸은 주름지고 구부정해졌지만 춤에는 생명의 뜨거움과 삶의 에너지가 있다.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는 지난 2014년 프랑스 파리 여름축제에 공식 초청된 것을 시작으로 유럽의 각종 페스티벌과 극장에 초대되고 있다.

“늘 춤이란 무엇인지, 우리 시대의 춤을 어떻게 정의할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었어요. 저희 엄마를 비롯해 할머니 세대들은 춤을 따로 배우지 않았지만 춤을 잘 추세요. 그런데, 손을 움직이는 것 등 동작이 대부분 비슷해요. 이 세대는 20세기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몸소 겪으셨는데, 몸에 그 역사가 자연스럽게 스며든 춤은 민속무용이라고 봐요. 전통적인 의미의 민속무용과 다르지만요.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이 세대의 춤을 기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또 운 좋게도 이런 작업이 시대의 흐름과 잘 맞아 많은 관심을 받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이후 안은미는 춤을 인류학적으로 접근하고 안무하는 스타일을 본격화했다. 청소년·중년 남성을 각각 리서치하고 만든 ‘사심없는 땐스’ ‘아저씨의 무책임한 땐스’, 시각 장애인·왜소증 장애인과 함께 각각 작업한 ‘안심땐스’ ‘대심땐스’, 북한춤 공부를 통해 만들어진 ‘안은미의 북한춤’ 등이 나왔다. 이들 작품에 대해 처음엔 일반인이 춤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을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치유하는 ‘커뮤니티 댄스’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안은미는 “일반인을 커뮤니티에서 끌어내 새롭게 자신의 몸의 주권을 재확인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커뮤니티 댄스’가 아니다”라면서 “춤을 사회로 돌려보내는 내 작업은 ‘퍼블릭 아트’라고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나는 아직도 베이비…하고 싶은 것과 배우고 싶은 것 많아”
안은미는 지난 2019년 데뷔 30주년을 맞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안은미래’전을 열었다. 당시 미술관에서 이례적으로 개최된 안무가의 개인전이라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전시는 자료 정리 차원의 단순 회고전 형식 대신 협업, 컬러, 트랜스포밍, 탈-위계 등 안은미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요 요소들을 통해 미래를 탐구하는 새로운 장으로 기획됐다. 그리고 관객참여 퍼포먼스를 전시의 구심점으로 삼아 미술관에서 또 하나의 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안은미는 이날 인터뷰에서도 ‘미래’를 강조했다.
“나는 아직도 스스로 ‘베이비’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하고 싶은 것, 배울 것이 많거든요. 돈이 없는 게 좀 문제이긴 하지만 대학 시절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감수하기로 한 거니까 괜찮아요. 제가 생전에 ‘아버지’라고 불렀던 평론가 박용구 선생님께서는 ‘예술가는 외로워야 한다. 하지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요. 앞으로도 제가 많은 사람을 만나며 작업할 때 가지고 갈 격언이에요.”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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