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올림픽에서 땀 흘린 건 선수나 심판, 스태프들뿐만이 아니다. 세계 고위급 인사들이 총집결하는 올림픽인 만큼 각 국 수뇌부 인사들도 자국 선수들의 편의를 챙기고 스포츠 외교에도 힘쓰느라 동분서주했다.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한 건 재일교포 출신 최윤(58) 부단장(OK금융그룹 회장)이었다.
최 부단장은 도쿄에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일상을 보냈다. 매일 오전 8시 단장회의에선 코로나19 상황 속 선수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대책 마련에 머리를 맞댔다. 무관중 상황 속에서 최대한 많은 경기장을 방문해 선수단을 격려하느라 숙소에 돌아오면 새벽 1~2시가 되는 게 보통이었다.
가장 신경 쓴 건 선수단의 편의였다. 재일교포 네트워크를 활용해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기도 했다. 선수단에 자전거 30대를 구해준 것도 최 부단장이었다. 지난 19일 서울 중구의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만난 최 부단장은 “식당, 병원에 가는 것도 힘들 정도로 선수촌이 넓었는데, 다른 나라 선수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있었다”며 “재빨리 재일본대한체육회와 연결해 준비했는데, 선수들이 많이 타 뿌듯했다”고 상기했다.
‘스포츠 외교’는 최 부단장의 중책이었다. 모리 요시로 전 총리, 하시모토 세이코 올림픽 조직위원장 등 일본 고위 인사들과 만나 한일 양국의 가교 역할을 했다. 최 부단장은 “2020 도쿄올림픽은 ‘어게인 2002’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2년 당시 일본에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대한민국’을 외치고, 한국인들은 ‘일본’을 외쳤다. 2020년이 한일관계의 새로운 시작이 됐으면 좋겠단 이야기를 건넸더니, 그분들도 잘 이해하고 공감했다”며 “스포츠는 정치를 떠나 그런(화합의)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
스포츠에 대한 최 부단장의 관심은 비단 이번 올림픽에서 뿐만이 아니다. 최 회장의 명함엔 대한럭비협회 회장, OK금융그룹 프로배구단 구단주 등 다양한 스포츠 관련 직책들이 함께 찍혀있다. 그 각별한 스포츠 사랑은 일본 사회 내 재일교포의 삶과 맞닿아있다.
최 부단장은 차별 속에서 생존해야 했다. 재일교포는 공무원도, 변호사도, 의사도 될 수 없었다. 재일교포 대부분은 건설업이나 요식업, 연예계 등에 종사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최 부단장의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모친이 재일교포 건설업자 등을 상대로 곱창집을 운영해 어렵사리 타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최 부단장은 일본인들이 외면했던 야끼니꾸를 대중화시키는 첫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것도 녹록하지 않았다. 일본계 은행에선 사업을 위한 대출이 잘 되지 않았기에 재일교포들이 만든 협동조합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사업을 일궈낼 수 있었다.
“한국에선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호사를 누린 것 아니냐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막상 일본에 간 사람들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차별 탓에 힘들게 살아왔어요. 생존할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였죠. 1988년 올림픽, 박세리의 활약, 일본에서 선동열이 보여준 투구, 2002년 월드컵까지 스포츠가 제게 안겨준 자부심이 그래서 너무 감사했어요. 스포츠를 더 돕고 싶었던 이유죠.”
한국에 오면서 선택한 소비자금융업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제한됐던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늘려준 것처럼, 최 부단장은 스포츠 중에서도 기회가 적은 비인기스포츠 선수들을 돕는 데 관심을 기울여왔다. 럭비, 농아인야구, 필드하키, 유도 등 종목도 다양하다. 꾸준한 관심으로 소득도 나왔다. 럭비 대표팀은 최강 뉴질랜드를 상대로 역사적인 득점을 올렸고, 2018년부터 후원한 재일교포 안창림은 한국 유도에 값진 동메달을 안겼다.
“저는 경영자이기 때문에 정말로 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열심히 일해요. 스포츠도 마찬가지죠. 야구·축구는 제가 필요하지 않아요. 저는 ‘비인기스포츠’가 아닌 ‘비인지스포츠’라고 부르는데, 언젠간 인지돼 인기스포츠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예요. 그런 분야일수록 조금만 도와주면 잘 되는 계기가 되고, 저도 흥이 생겨 더 도와주게 되죠.”
한국은 엘리트스포츠를 집약적으로 육성해 올림픽 10위 내외를 차지하는 스포츠 강국이 됐다. 다만 아마추어 스포츠 저변은 취약하다. 최근에 와서야 생활 체육을 강조하는 흐름이 생겼지만, 이번 올림픽에서도 고착된 ‘엘리트 시스템’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났다. 최 부단장은 “다른 선진국엔 학교마다 스포츠클럽이 평균 10개는 있어 모든 학생들이 스포츠와 함께 성장한다. 일본도 그런 수많은 아마추어의 저변 안에서 엘리트를 키웠기에 이번 올림픽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의 학교스포츠는 엘리트 중심이라 중고등학교 때 스포츠를 경험하기 힘들고, 성적을 중시하게 돼 기본기를 긴 호흡에서 키울 수 없다. 정책 자체를 전환해야 더 나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거라 본다”고 했다.
이는 단지 성적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스포츠를 즐기는 문화와 관련 산업, 선수에 대한 인식 등 스포츠를 둘러싼 모든 영역의 총체를 바꿀 수 있는 방안이다. 최 부단장은 “지금은 올림픽 때에야 양궁이나 럭비를 보지 평소에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안창림에 대해서도 ‘재일교포가 한국에 와서 스포츠 선수가 됐네’하고 관심을 표하는 정도”라며 “자신이 해본 경험이 있어야 올림픽 자체를 더 즐길 수 있고, 극한까지 자신을 훈련시켜 세계에 도전한 선수들에 대한 존중심도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최 회장은 앞으로도 스포츠에 꾸준한 지원을 해나갈 생각이다. “조국이 저를 인정해줘 (부단장 역할을 맡겨) 너무 감사해요. 제겐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죠. 학교 스포츠를 정상화시키는 건 물론 제가 맡고 있는 럭비를 인기스포츠로 만드는 데에도 힘쓰고 싶어요. 조국을 선택해 우리나라 사람들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선수들이 많아질 수 있도록 안창림 같은 재일교포 선수들에 대한 지원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
[도쿄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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