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주문하셨더라?” 깜빡해도 괜찮은 곳, 기억다방[人턴]

Է:2021-05-19 11:23
:2021-05-19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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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다방 직원인 최수남 어르신과 신상호 어르신.

“주문한 것과 다른 메뉴가 나와도 이해해주세요.”

어라, 이 카페 에티켓이 심상치 않다. 주문한 음료가 한참이 지나도록 안 나올 수도, 주문한 것과 아예 다른 음료가 나올 수도 있다. 그래도 손님들은 불평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음료를 맛본다. 어떻게 가능한 걸까?

바로 이곳이 ‘기억다방’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지키는 다양한 방법의 줄임말인 이곳은 치매를 앓는 어르신들이 직원이다. 치매가 있어도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됐다.

2018년 이동식 푸드트럭 형태로 시작한 기억다방은 올해부터 코로나19 방역지침 준수를 위해 금천구와 서대문구 치매안심센터에서 고정형 카페가 돼 손님을 맞고 있다. 국민일보는 지난 10일 ‘기억다방’을 찾았다.

우리 여기서 만나, 즐겁잖아요.
최수남 어르신이 10일 기억다방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울시 서대문구 치매안심센터에 들어서니 1층 입구부터 향긋한 커피향이 퍼져온다.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자원봉사자들이 보이고, 그보다 가까운 곳에 주문대가 있다. 6가지 음료가 전부인 메뉴판과 판매 장부, 다방 쿠폰을 넣는 함까지 단출하다. 그 앞에서 환한 미소로 “커피 한잔하시겠어요?”를 묻는 어르신은 올해 70세 경증치매환자 최수남씨다.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던 그는 카페 일이 어떠냐고 묻는 말에 “좋아요.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쳤다. 홀로 사는 그는 작년 5월 치매 판정을 받고 치매 노인 공공후견사업 대상자가 됐다. 공공후견인이 매주 한 차례 방문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의사결정을 돕는다. 기억다방에서 일하게 된 것도 공공후견인의 제안 덕분이다.

그는 과거 동사무소에서 청소일을 했다. 몸이 아프니 출근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고 줄곧 집에만 있었다. 지금은 1주일에 이틀은 기억다방에 나와 일한다. 집에 가야 할 때면 늘 아쉽다는 그는 기억다방에서 매일 새로운 얼굴을 보는 일이 즐겁다. 젊을 적 코미디언을 해보라는 주변의 권유에 유명 방송국 개그맨 시험을 본 적이 있었던 그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여전히 좋다. 소원을 묻자 “세상 떠날 때까지 여기서 일을 돕고 싶어요. 여기 오시는 분들 다 좋아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신상호 어르신, 뒤로 기억다방의 메뉴판이 보인다.

카페 한편으로 시선을 돌리자 수줍은 미소를 띤 채 인터뷰 차례를 기다리는 또 다른 어르신이 있다. 지난해 중순쯤 치매 진단을 받은 신상호씨다. 나이를 묻자 “좀 먹었는데요. 60 가까이 됐어요…” 하는 조용조용한 답이 돌아온다.

아내와 함께 사는 그는 인근에 손자, 손녀를 키우는 딸들이 살고 있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다. 그런데도 그에겐 기억다방에서 일하며 매일 만나는 사람이 바뀌는 게 또 하나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그는 “단골을 만드는 방법은 음료를 좀 더 맛있게 만들면 된다”면서 “아직은 음료 만드는 게 잘 안 되지만 서서히 배워나갈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기억다방의 직원으로서 치매 환자도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자신감과 활기를 찾아가며 살 수 있다는 것. 두 어르신의 일을 향한 애정은 기억다방의 목적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서대문구 치매안심센터의 강형준씨는 “어르신들이 처음 봤을 때보다 표정이 밝아졌다”며 “기억다방에서 살겠다거나 여기 나와서 좋다는 표현을 한다”고 전했다. 이어 “기억다방은 치매 환자들에게는 치매에 걸려도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시작점”이며 “보호자들에게는 환자들과 왔을 때 쉬실 수 있는 힐링공간”이라고 덧붙였다.

기억다방의 전경, 치매센터를 찾은 어르신들이 기억다방의 주된 손님이다.

현재 이 기억다방에선 세 명의 치매 어르신이 ‘보조’일을 하고 있다. 안전상 이유로 음료를 주로 제작하는 일은 자원봉사자들이 맡는다.

기억다방을 운영하기 전인 지난해 중순부터 치매안심센터 카페에서 자원봉사를 해오던 한영옥(58)씨는 기억다방의 숨은 공신이다. 평생 자영업에 종사한 한씨는 2016년 사업 정리를 하면서 실버타운이나 실버카페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치매를 앓던 부모님과 함께 지낸 경험이 있어 노인 관련 자원봉사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한씨는 어르신들이 카페를 ‘젊은이들이 가는 곳’으로 생각한다는 얘기를 꺼냈다. 시중에 있는 카페는 선뜻 찾지 못하던 어르신들이 이곳에 왔다가 편안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보람이라고 했다.

기억다방의 음료를 마실 수 있는 ‘다방쿠폰’은 치매센터를 방문한 이들에게 제공된다. 자연스레 치매 어르신이나 함께 온 가족들이 기억다방을 주로 찾는다.

“저기 맞은편에 앉아계신 어르신은 월요일마다 오세요. 할머니가 센터에서 치료받는 2시간 동안 앉아서 기다리는 거예요. 커피를 못 드셔서 항상 캐모마일 차를 드려요.” 이제 한씨는 찾아오는 어르신 얼굴만 봐도 ‘척하면 척’ 음료 취향을 꿰고 있다.

왼쪽은 단골 손님에게 캐모마일 차를 드리는 신상호 어르신, 오른쪽은 주문을 받은 뒤 장부를 작성하고 있다.

한씨가 인터뷰로 자리를 비운 사이 음료 주문이 들어왔다. ‘아메리카노 1잔, 자몽차 1잔’. 주문대 앞을 지키던 신씨가 장부에 기록하려다 멈칫한다. 방금 들은 메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눈치다. 그는 “어떤 걸 주문하셨죠?”라고 다시 물었다. 지켜보는 담당자나 손님 중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다.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기억다방의 기본 원칙이기 때문이다.

치매 어르신도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며
고령화로 인한 치매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지난해 9월 발표한 ‘치매와 경도인지장애 진료 현황 분석’ 자료에 따르면 경도인지장애와 치매로 진료받는 이들은 2009년 이후 10년간 대폭 늘었다. 경도인지장애는 2009년 1만4506명에서 2019년 27만6045명으로 19배 넘게 증가했다. 치매도 같은 기간 18만8287명에서 79만9266명으로 4배 이상 급증했다.

증가하는 치매 환자에 비해 사회 인식은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광역치매센터 관계자는 19일 “2018년 서울시민 치매 인식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치매 인식도 수준은 72.5점으로 낮게 나타났고, 스스로 치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도 22.8%로 낮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치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부정적 인식이 남아 있어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2018년 기억다방이 이동형 푸드트럭 형태로 운영됐을 당시 모습. 서울시 광역치매센터 제공

기억다방은 치매에 맞서고자 하는 어르신에게 사회 참여의 창구 기능을 하고 있다. 서울시는 (주)한독과 함께 2018년부터 이동형 푸드트럭 형태로 기억다방을 운영했다. 기억다방에서는 2018년에 92명, 2019년 74명의 경도인지장애 및 치매 어르신이 바리스타로 활동했다. 서울시 광역치매센터 황민아씨는 “코로나19 사태로 현재 고정형 카페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며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는 기존의 이동형 푸드트럭 형태의 카페도 병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대문구 치매안심센터 권혁기씨는 “기억다방은 주문한 것과 다른 게 나와도 이해해 주는 것이 기본 에티켓”이라며 “치매는 기억을 잃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에 따른 실수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만드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경도인지장애와 치매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질환을 앓는 어르신의 사회 참여를 포용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권씨는 “기억다방은 치매안심마을의 일환으로 만든 카페”라며 “치매에 걸려도 자기 자신을 구제할 수 있도록 사회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울시 광역치매센터 김선화 사무국장은 “치매 어르신들도 사회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과 지역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의 방법과 기회를 제공하는 장이 필요하다”며 “(기억다방이) 경도인지장애 및 치매 어르신들에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자신감과 성취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人턴]은 스쳐지나가는 일상에서 포착한 ‘낯선 현장’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코너입니다. 돌아볼 때 일상은 다르게 보이고, 때론 이 낯섦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듭니다. 국민일보 기자(人)들이 시선을 돌려(turn) 익숙하지만 낯선 현장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승연·김아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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