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엔 담배를 팔던 곳이었다. 분명 ‘ㅇㅇ상회’라는 이름을 달고 라면이나 부탄가스, 몇 종류의 과자와 비닐봉지(주변이 상가라서)를 팔기는 했지만 학창 시절에 본 건 대개 새 담배를 손바닥으로 털며 나오는 중년 남성들이었다. 이따금 상점 앞에 앉아 오가는 사람을 멀끔히 바라보던 주인 할머니의 모습을 본 기억은 있다. 그리곤 꽤 오랫동안 그곳을 잊고 지냈다. 조금 더 깨끗한 동네로 이사를 했고, 대형 마트나 할인 행사가 많은 프랜차이즈 상점을 주로 이용했다. 다시 그 앞을 지난 건 순전히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거리를 걷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반가운 풍경
7일 제주에 폭설이 시작됐다. 지구 온난화의 작용으로 북극 한파가 우리나라를 급습한 탓이란다. 산지엔 57년 만에 첫 한파경보가 내렸다. 온 섬이 하얗게 덮였다. 버스를 타고 무작정 찾아간 제주 구도심 어딘가에서 잠시 쉴 곳을 찾아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춥고 적막한 거리와 달리, 카페 내부엔 온기가 가득했다. 삼삼오오 사람들의 무리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주문을 하고 돌아보니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바닥과 천장, 두 면을 잇는 기둥의 나무가 낡고 헐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일본식 방이 모습을 나타냈다. 궤와 다다미방, 한지를 배접한 듯 세월의 얼룩을 고스란히 껴안은 벽이 민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 관덕로 일대의 상점을 들어간 건 무척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주인이 2층으로 커피를 가지고 올라왔다.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는 이번 폭설에 길이 얼어 미끄러졌다면서 처음 온 손님에게 눈길은 조심해서 다녀야 한다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고 내려갔다.



삶과 함께한 건축물의 시간
그곳은 순아카페였다. 김순아. 1950년대에 건물 소유주다. 당시 많은 제주인들이 그랬듯 그도 얼마 뒤 일본으로 돈을 벌러 떠났다. 세월이 흘러 고향이 그리워졌다. 제주로 돌아오기 위해 일본 생활을 정리하던 중 생을 마감했다.
순아씨보다 앞서서는 일본인이 주인이었다. 실제 일본인인지 당시 창씨개명을 한 한국인인지 알 도리는 없다. 이곳은 일본식으로 지어진 가옥이다. 제주목 관아청 앞. 당시 제주 성내에 살았던 것으로 미뤄 상인이나 관과 연관된 일을 하던 사람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집의 나이는 102년. 일제 강점기부터 코로나19가 횡행하는 2021년까지 그야말로 제주의 근현대사를 목도하며 자리를 지켰다.
순아씨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동서가 이곳을 물려받아 슈퍼를 시작했다. 그가 담배를 팔던 슈퍼 주인이다. 구도심 상권이 급격히 쇠락해갔다. 담배 몇 갑을 팔아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던 2017년 태풍 차바로 건물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할머니는 재건축을 생각했다. 그때 원도심 재생 업무를 보던 관계자가 이곳을 찾아 재건축 대신 보존을 권했다. 이야기가 있는 건축물이 원도심의 가치를 이어간다는 그의 말에 할머니도 공감했다. 방법을 생각했다. 보존하되 활용을 하려면 손님이 오되 너무 많이 와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건물주의 이런 뜻을 임차인이 잘 이해해주어야 했다. 결국 이곳엔 슈퍼 할머니의 딸의 친구가 4년째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달라진 공간들
제주도가 도시 재생사업을 추진하면서 낡고 허름한 동네의 상징이던 제주 원도심 곳곳에 생기가 얹히고 있다. 돌담을 정비하고 건물 안팎, 골목 곳곳을 정리하면서 동네가 깨끗해졌다. 장사를 하기도 임대를 주기도 애매했던 노후한 건물 가운데 옛 모습을 잘 간직한 건물은 건물주와의 협의를 통해 옛 형태를 최대한 살리면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나갔다.

한라산에서 제주항까지 관통하는 원도심의 상징 산지천을 복원하고, 오래전 식당과 숙박시설 목욕탕으로 쓰이던 건물을 재생해 책방과 갤러리, 카페로 변신시켰다. 옛 기상청 청사는 창업 협업 공간으로 조성했다. 제주 전통 주택 형태가 잘 보존된 고씨일가의 생가는 제주 서적을 열람하는 책방과 커뮤니티 장소로 전환했다.
제주의 가장 오랜 학교 중 한 곳인 제주북초등학교(1907년 개교)의 학교도서관(김영수도서관)은 리모델링 후 주민에 개방했다. 반세기도 더 전에 故김영수 동문이 후배들에게 고향 사랑을 당부하며 기증한 제주 최초 학교도서관. 세월이 흘러 낡고 외면받던 학교도서관은 아이들이 학교를 빠져나가는 오후 5시면 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연다. 재생사업으로 한층 예스러워진 외관은 바로 옆 제주 목관아 건물의 기와와 연결되며 마을에 한층 기품을 더했다.
모든 곳이 생기를 얻은 것은 아니다. 낡은 것은 여전히 낡고, 인적이 끊긴 곳은 여전히 적적하다. 그럼에도 원도심은 그 곳에서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향과 같은 반가움과 위로를 전한다.

원도심에 깃든 의미
모든 도시는 변한다. 새로운 거리가 생겨나고 옛 도심은 소원해졌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 다시 이곳으로 발길하고 있다. 구도심에는 있고 신도시에는 없는 것. 무얼까. 제주의 100년을 간직한 카페, 옛 돌담 기와집에 들어선 책방, 오래된 목욕탕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갤러리. 시간의 더께 위에 새로운 필요를 최소한으로 얹은 그곳에서 바로 ‘레트로’(추억, 회고를 뜻하는 restospec의 줄임)적 감성이 발아하고 있다. 남루한 공간이 새 기능을 얻어 방문자들에게 시간여행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제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던 곳, 제주 원도심. 동문과 서문 사이를 둥그렇게 쌓은 제주성이 있었고, 성내에 산다는 건 큰 자부심이었다. 관청이 있었고, 시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정치를 논하고 사회를 바꾸려 했고 예술도 시작됐다. 역사와 문화가 있었고 상점과 시장이 이어지며 병원과 은행이 여전히 즐비한 그곳은 이렇게 2021년 새로운 풍경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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