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없어요 지금, 다 나갔어요.”
19일 오후 서울 명동의 한 사설 환전소. ‘달러를 살 수 있느냐’는 말에 환전소 상인 A씨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 엔화, 중국 위안화는 다 있어요. 달러만 없어요.” 이곳에서 20m 떨어진 다른 환전소도, 길 건너편 환전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사설 환전소는 시중은행보다 싼 환전 수수료를 노린 실수요자들이 주로 찾는 곳이다. 그런데 최근 원·달러 환율이 급상승하면서 달러를 사려는 사람은 늘었는데 파는 고객은 뚝 끊겼다고 한다. “달러 지금 없어요. (파는 사람이) 들어와야 하는데 달러가 안 들어와요. 왜냐고요? 지금 환율이 비정상이잖아요. 이런 게 금융위기 전조(前兆)에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로 촉발된 금융 불안 사태가 ‘달러 품귀’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아직 시중은행 환전 여건에는 문제가 없지만 사설 환전소와 같은 ‘길거리 경제’에서 불안 심리가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환전 업무도 평소와 다름 진행 중이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외환 유동성에도 대비해서 어느 정도 위기 상황이 와도 견딜 수 있는 준비는 돼 있다”면서도 “단기적 달러 부족 현상에 대한 경계도 갖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선 원·달러 환율이 무려 40.0원 폭등해(원화 약세) 1285.7원에 거래를 마쳤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던 2009년 이후 11년 만이다. 환율 종가가 하루에 40원이나 오른 것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이다. 이승훈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주가 급락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 불안이 금융위기 초입과 같은 ‘거래 상대방 위험’을 유발하며 달러화 수요를 급팽창시켰다”고 말했다.
이는 코로나 패닉에 빠진 글로벌 금융시장이 일제히 ‘달러 확보’ 전쟁을 벌이면서 촉발된 사태라는 분석이 나온다. 무조건 ‘캐시(현금)’를 확보해야 한다는 공포감이 시장을 지배했다는 것이다. 블락클리 어드바이저 그룹의 최고투자책임자인 피터 부크바르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현금 외엔 숨을 곳이 없다”고 말했다.
달러 강세는 원화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지수화한 달러 인덱스는 이날 101.54 수준까지 치솟으며 100선을 돌파했다. 2016년 전 고점(102)을 코앞에 둔 상황이다.
코로나 금융위기 속에서 가격 상승을 이어가던 채권마저 하락세로 전환했다. 18일(현지시간) 미국 10년물 국채 수익률은 0.994%에서 1.259% 수준까지 올랐다(채권값 하락). 채권과 함께 안전 자산으로 꼽히던 금도 내림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날 뉴욕상품거래소(COMEX)에서 거래되는 금 선물 가격은 전 거래일 대비 3.1% 더 떨어지며 온스당 1493달러까지 주저앉았다.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본격화됐던 이달 초 온스당 1700달러 선까지 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13% 가량 떨어진 수치다. 안예하 키움증권 연구원은 “미국 증시 급락 등 극도의 공포심이 시장 전반에 퍼져 채권 수요마저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달러 유동성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이날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거시경제금융 점검회의’에서 “달러 유동성 확보 경쟁이 점차 심화하는 분위기”라며 “기업과 금융회사가 필요한 외화를 원활히 조달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코로나 금융위기가 이어지는 한 ‘달러 수요 증가→원화 약세’ 흐름은 한동안 불가피할 거란 전망이 나온다. 김효진 KB증권 연구원은 “선물환 포지션 확대 조치 외에도 2008년 10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원화 가치를 크게 안정시켰던 미국과의 통화 스와프가 체결돼야 이번에도 원화 안정이 가능할 거 같다”고 말했다.
양민철 조민아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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