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투운동은 켜켜이 쌓인 변화를 혁명으로 드러냈습니다. 수많은 시민이 ‘미투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외쳤습니다. 하지만 성폭력 법체계는 여전히 ‘폭행 또는 협박’을 강간 구성요건으로 인정합니다. 국가의 직무유기입니다.”
2년 전 시작된 미투(#MeToo) 운동은 판을 바꿨다. 하지만 여전히 현행법상 ‘강간죄’는 위력의 개념을 배제한 채 폭행과 협박이 수반됐는지를 묻는다. 강압적이지 않았다면 합의가 됐다고 봤다. 적극적인 동의를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강간죄 내용이 수정된 건 1953년 제정 후 단 한 차례.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개념을 지운 정도로 그마저도 25년 전 이야기다. 성폭력은 개개인의 범죄가 아닌 대한민국 구조적 문제다. 국가는 성폭력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고 있나. 국회는 언제쯤 응답할까.
‘강간죄 개정’ 나몰라라
여성가족부는 지난달 20일 여성폭력방지위원회를 열고 ‘비동의 간음죄’를 언급했다. 성폭력을 ‘강간과 추행의 죄’에서 ‘성적자기결정권을 해하는 죄’로 명칭을 변경하고 비동의 간음죄 신설을 검토한다고 했다. 폭행·협박이 없더라도 상대방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간음한 경우 성적자기결정권 침해로 판단하겠다는 의미다.
현재 비동의 간음죄를 별도로 신설하는 내용을 담은 형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돼 있다. 209개 여성인권단체로 구성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는 지난해부터 “강간죄 구성요건은 반드시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규정돼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피해자에게 “왜 저항하지 않았나”를 물을 게 아니라 가해자에게 “어떻게 동의를 받았나”를 따져봐야 한다는 의미다.
현행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을 강간죄의 구성요건으로 명시한다. 피해자가 폭행 또는 협박을 당하고 그 수준은 현저히 저항이 곤란한 정도여야 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얼마나 힘껏 밀어냈는지 스스로 입증해야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직장을 잃을 까봐” 혹은 “거절하기 어려워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피해자의 호소는 무력해졌다. 법적 처벌 공백 속에서 고통은 오롯이 피해자 몫이 됐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지난해 11월 ‘20대 국회 강간죄 개정을 위한 토론회’에서 “미투를 통한 여성들의 용감한 문제 제기가 2년이 지났다”며 “원내 5당에서 성폭력 관련 법안이 쏟아져 나왔지만 하나도 제대로 처리된 게 없다”고 꼬집었다.

강간죄의 역사
한국성폭력상담소는 “강간죄 구성요건은 피해자의 동의보다 여성의 ‘정조’가 더 중요했던 가부장적 인식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성폭력 보호법익을 정조로 규정하고 보호해야하는 피해자와 그러지 않아도 되는 피해자로 구분하면서 법적으로 ‘피해자다움’을 규정했다는 의미다.
1953년 대한민국 형법이 제정됐던 당시 성폭력 범죄를 규정하는 형법 제32장은 ‘정조에 관한 죄’였다. 형법 제297조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였다. 이 때 반항을 할 수 없는 상태였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보다 여성의 정조를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여성은 순결해야 했으니까. 결국 화살은 피해자에게 꽂혔다. 몸가짐을 잘못했다는 이유였다.
변하긴 했다.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됐고 1995년 형법 제32장은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됐다. ‘성적 자유 또는 성적자기결정권 침해의 죄’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적 자유란 적극적으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원치 않는 성행위를 하지 않을 자유다. 성적자기결정권은 성행위를 할 것인지, 누구와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다. 지켜지고 있을까.
여전한 최협의설
최협의설이 존재하는 한 성적자기결정권은 보장되기 어렵다. 가장 협소한 의미의 폭행·협박이 있는 경우 강간을 인정하는 최협의설은 아직도 성폭력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
최협의설에 의거하면 피해자는 “얼마나 어떻게 저항했나요?” “왜 거부하지 않았나요?” 같은 질문을 받고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성폭력 피해상담 분석 및 피해자 지원방안 연구’에 따르면 많은 피해자가 미투 운동 이후 용기를 냈으나 처벌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대부분 최협의설 때문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대다수 성폭력은 권력관계에서 발생한다”며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최협의설에 근거해 판결을 내리느냐는 법조인도 있지만 법에서 최협의설을 명시하는 한 판결에 분명히 영향을 끼친다”고 강조했다.

Yes means Yes… 거부 아닌 동의로
핵심은 ‘거부했느냐’가 아닌 ‘동의했느냐’다. 전국 66개 성폭력상담소 상담사례 분석 결과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이 발생하는 강간은 전체 71.4%에 달했다. 폭행과 폭력을 동반한 성폭력 피해자는 10명 중 3명이 채 안 된다는 의미다. 이런 과정이 사실상 필요 없는 권력 관계였기 때문이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았죠’
‘평소에도 마음대로 안되면 물건을 부쉈어요. 맞을까봐 무서웠어요’
‘계속 졸랐어요. 싫었지만 거절하기 어려웠어요.’
‘이상한 짓 안 한다고, 쉬러 가자고만 했어요’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 상담사례 중-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없었던 강간 사례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피해자가 벗어나기 어렵고 도움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저항을 포기하는 경우다. 상습적으로 위협을 가해온 상황에서의 두려움, 입원 중 의료인에 의한 성폭력, 고립된 상황에서 발생한 성폭력 등이다. 두번째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신체적·정신적으로 무력한 상태를 이용하는 경우다. 잠 든 사이, 술 또는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거부 의사를 밝혔으나 기습적으로 발생한 성폭력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미경 성폭력상담소장은 “이제 법은 피해자에게 ‘왜 저항을 하지 않았나요?’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라며 “동의 없이 또는 명백한 동의 없이 등으로 동의 여부에 초점을 둔 구성요건을 명시하고 가해자에게 ‘어떻게 동의를 구했나?’ ‘무엇을 근거로 동의 여부를 판단했나’를 물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는 이미
세계는 이미 ‘동의’에 집중하고 있다. 유엔은 동의를 기준으로 강간을 정의할 것을 여러 차례 권고했다. 특히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8년 한국 정부에게 형법 제297조를 개정해 피해자의 자유로운 동의의 부재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영국, 스웨덴, 독일, 캐나다, 미국 등의 여러 선진국은 이미 국제적 기준을 따르고 있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동의 없는 성적 침해를 강간죄 등으로 규정해 폭행 및 협박 없는 성폭력을 처벌한다. 형식적으로는 동의가 있다고 해도 폭행 협박, 위계나 위력, 피해자의 연령, 장애유무, 무의식, 공포 등을 고려해 실질적인 동의가 불가능한 경우까지 고려한다. 특히 스웨덴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동의를 확인하지 못한 경우까지 처벌한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