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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의 아베’, 남·북한 때리며 살아온 정치 인생

위기마다 남·북한 때리기로 지지율 끌어올려

입력 : 2019-07-04 05:01/수정 : 2019-07-04 05:01
지난 2016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사이타마현 아사카의 육상자위대 훈련장에서 열린 자위대 사열식에 참석하고 있다. 이날 자위대는 욱일기를 들었다. AP뉴시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정치 경력에서 전환점은 지난 2002년 북한과 일본의 역사적인 첫 정상회담이다. 당시 그는 관방부 장관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평양 방문 수행단에 포함됐다. 하지만 그는 공동성명 초안을 평양행 비행기에서 처음 접했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그런데, 일본인 납치 문제를 부인해오던 북한이 정상회담에서 해당 사실을 처음 인정하면서 사태가 급반전됐다. 북한은 일본인 13명을 납치했지만 8명이 사망하고 5명이 생존해 있다고 밝혔다. 당시 아베는 “김정일 위원장의 사죄와 설명이 없으면 공동선언 서명은 재고해야 한다”고 고이즈미 총리에게 진언했다. 그리고 일본의 경제적 지원이 시급했던 김 위원장은 고이즈미 총리의 요구에 사과를 표명했다.

회담 소식이 보도되면서 일본은 반북 여론으로 달아올랐다. 아베가 스타 정치인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아베는 또 북한이 화해 제스처의 일환으로 고향 방문 명목으로 일본에 일시 돌려보낸 납치 피해자 5명에 대해 북한에 돌아가지 않도록 막았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를 외조부, 아베 신타로 전 외상을 부친으로 둔 아베는 이전까지만 해도 ‘유약한 정치인 3세’라는 이미지였지만 납치 문제를 계기로 과단성 있는 정치인으로 부각되며 2006년 자민당 간사장으로 발탁됐다.

아베 총리가 지난해 6월 납북 피해자 가족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동안 강력한 대북 제재를 외쳐오던 아베 총리는 남북 정상회담 및 북미 정상회담이 이어진 후 자신이 김정은 위원장과 직접 만나 납치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전혀 성과가 없다. AP뉴시스

납치 문제는 이후에도 아베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오죽하면 ‘납치의 아베’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아베는 2006년 납북 피해자 요코타 메구미의 DNA 검사 결과 발표를 통해 또다시 입지를 다졌다. 당시 도쿄에서 북핵 6자회담 대표들이 비공식 접촉을 가질 때 아베가 기자들에게 요코타의 DNA가 아니라고 발표한 것이다. 북한의 격렬한 반발이 예상되고 6자회담이 중단될 게 뻔했지만 그에게는 국민의 인기를 끌 납치 문제의 이슈화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6자회담 중단 이후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아베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강력한 대북 제재를 주장한 그는 보수 강경파들의 대표로 확실히 자리매김하면서 2006년 9월 총리가 됐다. 한마디로 북한이 아베를 총리로 만든 일등공신인 셈이다.

그런데, 1차 내각 시절의 아베는 지금처럼 극우 색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베는 총리로서 1995년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반성한 무라야마 담화와 일제 종군위안부의 존재 및 강제성 동원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던 1993년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전까지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에 대해 자학사관이라며 비판하면서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지 않던 것에서 달라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1차 내각이 1년 만에 끝난 뒤 2013년 2차 내각으로 돌아온 아베는 극우 본성을 더이상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는 ‘북풍’으로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하고 총리 3연임까지 이뤄냈다.

예를 들어 2016년 초 아베 내각은 아마리 아키라 경제재생담당상의 정치자금 스캔들, 대대적인 방위예산 증액 등을 둘러싸고 비판이 쇄도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북한의 잇따른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는 아베를 둘러싼 문제들을 단번에 날려보냈다. 특히 아베는 2차 내각 출범 이후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전보장 관련 법안을 만든 뒤 방위예산을 매년 역대 최대로 경신해왔는데, 북한 덕분에 재무장의 정당성을 얻게 됐다. 게다가 아베는 2014년 북한과 제재 일부를 해제하는 대신 납치 피해자 생존자를 재조사하는 ‘스톡홀름 합의’에 이르렀지만 이후 진전이 없자 납치 피해자 가족으로부터 ‘납치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줬다.

지난 2017년 불거진 아베 총리의 사학 스캔들이 지난해 또다시 재점화 한 후 시민들이 의회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당시 일본 재무성이 문서 조작을 하는 등 알아서 기는 '손타쿠'를 한 것이 드러났다. AP뉴시스

아베에게 가장 위기였던 2017년 역시 북한 덕분에 살아났다. 당시 사학스캔들로 아베 내각의 지지율은 20%대까지 떨어졌다. 중의원을 전격 해산하는 승부수를 던진 아베는 북한의 잇따른 미사일 도발에 따른 안보 위기를 앞세워 선거에서 승리했다. 아베 내각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한반도 유사시’를 상정한 대응책을 발표하는 등 한반도 위기론을 끝없이 부채질했다.

하지만 북한 특사단의 평창 방문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남·북 관계 및 북·미 관계가 호전돼 북한의 위협이 사라지자 아베는 한국을 때리기 시작했다. 물론 아베가 그동안 교과서 문제,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갈등을 이용해 왔지만 ‘북풍’이 불가능해지자 자국의 ‘반한’ 감정을 최대한 자극하고 나선 것이다.

문제는 아베의 장기 집권 동안 일본 사회도 한층 우경화된 탓에 일본 방송까지 노골적으로 ’혐한’ 발언을 내보낼 정도가 됐다는 것이다.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서 ‘오사카에 북한 테러리스트들이 대거 잠복해 있다’ ‘한국에서 일본 맥주가 너무 인기 있는 만큼 일본이 맥주 수출을 막으면 폭동이 일어난다’ 등 어이없는 발언이 난무하는 상황이다.

아베 총리가 지난 5월 일본을 국빈방문 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도쿄 롯폰기의 이자카야에서 저녁을 먹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의 굴기에 맞서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용인하고 있다. AP뉴시스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은 아베에게 호기였다. 아베는 ‘징용공’이라는 말 대신 강제성이 빠진 ‘옛 한반도 출신 노동자’라는 표현을 쓰는 한편 판결에 대해 1965년 한·일 청구권·경제협력협정을 명백히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협정이 재산권에 대해서만 규정돼 있으며, 위자료는 별개라는 게 국제법은 물론 기존의 일본 정부 입장이었다. 따라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것이므로 일본 정부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 일본 야당도 국회에서 이 부분을 지적한 바 있다.

사실 아베 내각은 지난 1년여 기간 동안 러·일 쿠릴열도 담판 실패, 상수도 민영화, 아베노믹스 통계 부정, 내각 각료들의 잇따른 망언과 추문으로 인한 퇴진 등 수많은 문제에 직면했었다. 하지만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비난을 비롯해 올 초 한·일간 ‘초계기 저공비행-레이더 갈등’을 일으키는 등 틈만 나면 ‘한국 때리기’로 지지층을 결집시키며 문제에서 벗어났다. 한국의 일본산 수산물 수입과 관련한 세계무역기구(WTO) 분쟁에서 역전패하며 비난 여론에 직면했던 아베는 21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경제 제재를 가하는 초강수를 두기에 이르렀다. 숙원이라는 전쟁 가능 국가로의 개헌을 위해 이번 선거 승리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베가 그동안 한국 때리기를 너무 우려먹은 탓에 최근 지지율에 큰 변화는 없어 보인다. 물론 우익이 장악한 온라인상에서는 제재 조치가 환영받고 있지만 일본 기업들과 언론에서는 정치 문제에 경제를 끌어들인 것에 대한 비판이 많다. 무엇보다 이번 제재 조치가 일본에도 피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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