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라는 축제에 스며든 밀항자이자 수호신, 그리고 박해받는 순교자.”
작가 브누아 아이메르만은 심판을 이렇게 묘사했다. 잘해야 본전, 못하면 역적. 그가 생각하는 심판은 애처로운 존재다.
정적인 경기에서 심판의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카메라가 집중적으로 심판을 포착하는 순간은 명확히 정해져 있다. 격렬한 반칙이 이어질 때, 선수들의 신경질을 받아 줄 때, 휘슬이 울릴 때 정도다.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래도 결승골을 넣은 선수보다 주목받는 날도 있다. 승리의 향방을 결정짓는 판정을 했을 때다. 명시돼 있는 규정 밖의 상황에서 선택이 필요한 순간, 두 팀 중 한쪽은 반드시 손해를 본다. 결국 심판은 어떤 판정을 하더라도 결국 패배를 부른 역적 신세를 면치 못한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토트넘 홋스퍼 공격수 손흥민이 레드카드를 받았다. 잉글랜드 진출 후 첫 퇴장을 당했다. 주심은 퇴장을 유예할 수 있는 옐로카드가 아닌 레드카드를 꺼내 들며 곧바로 그라운드에서 나갈 것을 명령했다. 4일 영국 본머스 바이탈리티 스타디움에서 열렸던 2018-2019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37라운드에서다.
선발 출전한 손흥민은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볐다. 전방과 2선을 넘나들며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고, 위협적인 슛도 수차례 날렸다. 본머스 수비진이 손흥민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받는 집중 견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경기를 뒤흔들만한 변수는 하프타임 직전인 전반 43분에 나왔다. 혼전 상황에서 볼을 두고 다툼을 벌어지던 과정에서 손흥민과 라이언 프레이저의 충돌이 있었다. 주심은 일시적으로 경기를 중단했다. 손흥민이 허리를 숙여 공을 잡으려 하자 제퍼슨 레르마가 볼을 낚아채기 위해 뒤에서 달려들었다. 볼을 향하던 손흥민의 오른손이 밟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순식간에 위험한 상황이 연출됐다.
손흥민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격분한 표정으로 레르마의 등을 밀어 넘어뜨렸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본 주심은 손흥민에게 곧바로 레드카드를 꺼내 들었다. 손흥민의 퇴장으로 수적 열세를 안게 된 토트넘은 설상가상으로 후반 시작과 함께 한 명의 선수를 더 잃었다. 피치 위에 교체 투입된 수비수 후안 포이스가 그라운드를 밟은 지 133초 만에 레드카드를 받았다.
객관적 전력상 우위에 있다고 평가되는 토트넘으로서도 2명의 퇴장은 극복하기 쉽지 않았다. 남은 시간 수비적으로 나서며 무승부를 노렸지만, 후반 추가시간 니단 아케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얻어맞으며 0대 1로 패했다. 한 경기 덜 치른 5위 아스널(승점 66)과의 격차는 승점 4. 4위권 내에 진입한 팀들에게 주어지는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은 이제 낙관할 수 없다. 손흥민의 프리미어리그 첫 퇴장은 그렇게 토트넘의 시즌 끝자락 중요 기로에서 발생했다.
주심은 크레이그 퍼슨. 낯익은 이름이다. 돌이켜보면,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주제 무리뉴의 입을 통해서였다. 무리뉴가 2017년 12월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사령탑으로 있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맨유는 사우샘프턴과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밀집 수비에 고전하며 0대 0 무승부를 거뒀다. 맨체스터 시티와 선두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았다. 경기가 끝난 뒤 무리뉴 감독은 “승점을 뺏겼다”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패배의 책임을 퍼슨 주심에게 돌렸다.
전반전 혼전 상황에서 볼이 사우샘프턴 수비수의 팔을 스쳤으나 퍼슨 주심이 핸들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퍼슨 주심이 정상적이지 않은 핸들링 파울로 인정했다면 맨유는 페널티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퍼슨 주심은 사우샘프턴 수비수에게 의도가 없었다고 판정했다. 제아무리 한 성깔 한다고 알려진 무리뉴일지언정 감독이나 선수가 주심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비난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은 심판 모욕을 징계 사유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이들은 불만이 있더라도 간접적으로 돌려 비판을 한다.
퍼슨 주심은 2015-2016시즌에도 한 차례 오심 논란에 휩싸인 전례가 있다. 리버풀과 본머스의 2라운드 경기에서였다. 리버풀 공격수 크리스티안 벤테케가 전반 26분 세트피스 상황에서 결승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본머스 선수들은 벤테케의 골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벤테케 개인의 득점 과정에서는 문제가 없었지만,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던 필리페 쿠티뉴가 날아오는 볼을 향에 발을 뻗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프사이드의 ‘간섭(Interfering)’에 대한 해석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볼을 직접 받지 않더라도 플레이에 간섭한다면 이는 오프사이드에 해당한다. 상대편을 방해하거나 그 위치에서 이득을 얻었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본머스 선수들은 벤테케 득점 이전에 있었던 쿠티뉴의 행동을 어필했다. 하지만 퍼슨 주심은 본머스 선수들의 항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득점하겠다는 도전이 있었느냐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심판 재량이다. 퍼슨 주심은 쿠티뉴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토트넘전에서 퍼슨 주심의 판정 덕을 본 본머스는 4년 전 퍼슨 주심이 만들어낸 피해자였다.
퍼슨 주심이 지난 4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며 판정 문제로 언론의 입에 크게 오르내렸던 적은 이 두 차례 정도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한국 속언이 퍼슨 주심에게도 적용된다면 일련의 두 사태는 그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자신의 재량으로 경기를 뒤바꾸는 변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허용하는 범주가 굉장히 넓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관대한 성향을 가진 주심으로 평가된다.
손흥민의 퇴장을 명령한 퍼슨 주심의 판정에 문제는 없다.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은 보복성 플레이를 엄격히 징계하고 있다. 손흥민은 순간적인 격분을 통제하지 못해 레르마과 물리적 충돌을 벌였다. 그렇다면 손흥민은 퇴장이 분명하다. 규정에 명시된 부분으로 주심의 재량이 판단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레르마의 경우는 다르다. 그가 손흥민을 밀치는 등 비신사적인 행위를 한 것은 맞지만, 이에 대한 대중의 해석과 주심의 심판은 괴리감이 있을 수 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축구에서도 주심의 판정은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다. 레르마의 행동은 규정을 벗어나 주심의 권한 내에 있었다. 퍼슨 주심이 레르마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았다면 그런 것이다. 규칙의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침해할 수 없는 심판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운 원칙을 토대로 한 심판의 경기 운영법은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한다.
본머스 선수들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평소보다 거친 파울을 반복한 것은 퍼슨 주심의 관대한 성향을 이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퍼슨 주심은 프리미어리그 수백 경기를 관장해왔던 베테랑이다. 그에 대한 분석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레르마와 신체적 접촉이 있던 순간 손흥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그대로 그라운드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손흥민은 감정적이었고, 본머스 선수들은 영리했다.
브라질 축구 스타 네이마르는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액션이 과도하다고 비판받은 적이 있었다. 그가 발을 부여잡고 그라운드에 뒹구는 모습은 패러디로 제작돼 축구 팬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치치 브라질 축구대표팀 감독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위였다”며 제자를 감싸 안았다. 손흥민의 퇴장을 보며 그의 말에 공감 할 수 있었다.
송태화의 인저리타임
인저리타임. 전광판의 시계는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송태화 기자가 함성소리에 스며드는 이야기를 전하는 스포츠 연재입니다.
송태화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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