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실리콘밸리엔 야근이 없다?

Է:2019-01-18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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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을병정 그 아래, 한국 IT노동자의 한숨]그는 오전 10시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했다

IT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갑도 을도 아닌 병과 정 아래”라고 말한다. 최첨단 4차 산업혁명의 주역이라는 수식어는 화려한 외관일 뿐이다. 혹독한 야근과 비정상적인 대우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국민일보는 ‘갑을병정 그 아래, 한국 IT노동자의 한숨’ 시리즈를 통해 IT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도 용기를 냈다.

게티이미지뱅크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시스템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하리 자얄만(36)씨. 그와의 인터뷰는 한국 시간으로 17일 새벽 3시 30분에 진행됐다. 아마 그와 비슷한 일을 하는 한국의 IT 노동자들도 그 시간, 어디선가에서 야근 중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자얄만씨의 시간은 지구 반대편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맞춰야 한다. 그의 직장은 연매출 1조원(8억6100만 달러) 이상을 달성하고 있는 실리콘밸리의 유명 온라인 게임업체 징가다. 2년간 이곳에서 시스템 개발자로 근무 중인 그는 매일 오전 10시~10시 30분에 출근해 오후 5시면 퇴근한다. 점심시간을 빼면 일주일 평균 근무 시간은 30~35시간. 그나마 회사 근무는 월~목요일까지고 금요일은 집에서 일한다.
IT 경력 8년차인 그는 중학교 때 인도에서 미국으로 온 이민 1.5세대다.
그는 “인도는 SW개발자 등 IT 인력의 근무 여건이 좋지 않다. 한국인 동료들이 한국도 인도와 다를 바 없다고 하더라”면서 “나는 인도에서 일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시카고에 위치한 핀테크 회사 ‘아반트’의 머신러닝 개발자 김준일(26)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머신러닝은 인공지능의 연구 분야 중 하나다.
김씨는 “수평적인 회사 분위기가 너무 좋다. 합리적 제안을 통해 회사 경영 모델을 바꿔본 적도 있다”고 말한 뒤 “(오늘은) 집에 커튼 고치는 사람이 온다 해서 자택근무 중”이라고 답했다.

반도체 자동화 설계로 유명한 한 외국계 기업 한국지사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A씨(28)는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해외 체류 경험이 없는 이른바 ‘토종 한국인’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회사 생활에)너무 만족한다”며 “한국 회사는 못 다닐 것 같다”고 했다.
인도에서는 일하지 않겠다는 인도계 개발자와 한국 회사 근무를 꺼리는 한국인 개발자들. 그들이 모국 기업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단언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철저한 ‘자유’와 엄중한 ‘책임’
이들이 한국과 인도에서 일하는 걸 거부한 데는 이유가 있다. ‘자유’였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은 없었고 자신의 업무에 맞춰 출근과 퇴근 시간을 스스로 결정했다. A씨의 경우 기자와 통화한 날에도 오전 10시30분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했다. 평소보다 일이 적었기 때문이다.

근무 형태도 자유로웠다. 자얄만씨는 금요일마다 자택에서 ‘원격근무’를 한다. 시카고에 위치한 김준일씨의 회사에도 3000㎞ 넘게 떨어진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회의가 필요하면 화상회의를 했다. 개발자에게 ‘재택근무’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담당자에게 보고만 하면 언제든 재택근무를 선택할 수 있다. 김씨는 “상사 눈치 보는 사람은 없다. 너무 평범한 일”이라고 했다.
덕분에 일과 가정의 균형을 찾는 일도 한결 수월했다. 자얄만씨의 직장 동료는 아내가 출장을 갈 때면 회사에 나오지 않고 아이들의 등하교를 돕는다고 했다.

물론 야근이 없는 건 아니다. 자얄만씨는 “신규 게임이 런칭할 때면 직원들 대부분이 야근 체제에 들어간다”고 했다. 게다가 정직원인 ‘풀타임’ 근무자들은 야근을 해도 수당을 받지 않는다. 수당도 없이 야근이라니. 실리콘밸리의 노동조건이 한국 IT업계보다 더 열악한 걸까.

실리콘밸리의 유명 온라인 게임 업체 징가에서 시스템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하리 자얄만씨는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5시면 퇴근한다. 16일(현지시간) 오전 10시 30분에 출근한 자얄만씨가 자신의 업무를 보고 있다.


그래도 불만이 없는 이유는 있었다. 게임을 출시하고 나면 직원들은 최소 2~3주의 휴가를 떠난다. 직속 상사에게만 보고만 하면 끝이다. 세계적 IT 기업인 구글이나 페이스북은 아예 인재를 영입할 때 1년 중 6개월은 휴가를 보내준다는 조건을 내걸기도 한다.

프리랜서 개념인 ‘파트타임’ 직원은 회사가 좀 더 철저히 관리한다. 출근과 퇴근 시간을 체크하는 기기를 구비해 인사담당자는 이들의 출퇴근 시간을 기록해 임금을 지급한다.

만약 회사가 출퇴근 기록 기기를 비치하지 않았다가 당국에 적발되면 회사는 거액의 과징금을 내야 한다. 직원이 자신의 출퇴근 기록을 요구하면 회사는 반드시 공개해야 한다.

◇‘너는 해고야’는 성과 압박일까
물론 ‘자유’는 철저한 책임을 담보로 주어지는 것이다. 근무 태만은 상상할 수 없다. 성과를 내지 못해 역할이 축소된 팀원은 곧바로 해고 당한다. 미국 노동법에는 ‘임의고용(At-will employment)’이라는 조항이 있다. 회사는 특별한 사유나 사전 예고 없이 직원들을 해고할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보스가 직원에게 “너는 해고야(You’re fired)!”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상하지 않은 이유다.

물론 해고의 이유는 합당해야 한다. 평가 기준은 업무 성과다. 직원들이 지나치게 ‘성과 압박’에 시달리지 않을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성과 압박은 성장을 위한 과정일 뿐이라는 게 미국의 IT 기업 직원들의 말이다.

한국지사에 일하는 A씨는 처음 입사했을 때 밤을 새며 업무에 적응했다. 강요에 의한 ‘야근’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열매는 달콤했다. 입사 첫해 인사고과에서 ‘S등급’을 받았다. 이에 따른 인센티브도 주어졌다.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A씨는 “고과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그간의 노력을 충분히 보상 받았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오히려 성과 위주의 직원 평가는 ‘수평적 직장 문화’와 더해져 시너지 효과를 냈다. 성과를 내기 위해 비판도 서슴없이 했다. 애초에 위계질서도 없었다. 말단 직원은 직속 선배를 ‘제임스’ ‘토마스’처럼 이름으로 불렀다. 김씨는 “합리적 제안을 통해 회사의 경영 체계를 바꾼 적도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성과가 좋은데도 해고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인종차별 혹은 성차별적 발언을 하거나 폭언을 하는 사람은 바로 쫓겨난다.
한국인 개발자들이 위계질서에 따른 갑질이 일상화된 한국 기업 대신 외국계 기업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꿈꿀 수 없을까
실리콘밸리 IT노동자들의 꿈같은 이야기들이 한국에서도 실현될 수 있을까.

일단 인식의 전환부터 필요하다는 게 IT노동자들이나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 유재홍 선임연구원은 “IT노동자들은 장소와 시간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이동하며 일하는 일종의 ‘노마드’”라며 “과거 제조업 마인드로 IT 업계를 바라보니 근무형태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하는 이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자얄만씨는 “제조업 중심의 인도나 한국은 SW노동자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아 야근을 강요하는 문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료 : 한국경제연구원>

해법은 한국과 기업 조직이나 경제 형태가 비슷한 일본을 통해 찾을 수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6년 발간한 ‘사무직 근로시간 실태와 포괄임금제 개선방안’에서는 일본이 우리나라와 고용환경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노동법도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나라 IT산업의 근무 환경을 일본의 기획업무형 재량노동제 형태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권순원·박지순·박지성이 2014년 내놓은 ‘근로시간제도의 합리 규율 방안 연구: 화이트칼라 노동시간을 중심으로’ 논문에는 이 같은 내용이 상세히 설명돼 있다.
일본은 1988년부터 재량노동제를 실시하고 있다. 재량노동제에서는 노사가 서면협정을 맺으면 사용자와 근로자가 합의로 정한 시간을 업무시간으로 간주한다.

일본은 연구원, 디자이너, 변호사, 편집자 등 11개 전문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에게 적용하는 기획업무형 재량근로시간제를 운영해 왔다. 1998년에는 노동기준법을 개정하면서 기획업무형 재량근로제도 새롭게 도입했다. 사업운영에 관한 기획 입안 조사 및 분석업무이면서 수행방법을 근로자의 재량에 맡길 필요가 있다면 기획업무형 재량근로제를 적용할 수 있다는 거다.

우리나라는 현재 연구개발, 취재·방송 제작, 디자인 등 제한된 일부 전문업무에만 재량근로제를 허용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2016년 ‘장시간 근로 해소 위해 미국식 근로시간 면제제도 도입해야’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일본의 재량근로제에서 한발 더 나아가 미국식 근로시간면제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한경연은 “우리나라가 97년 탄력적 근로시간제, 선택적 근로시간제, 재량근로시간제 등의 유연근로시간제를 도입했지만 활용률이 낮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면서 “근로기준법 및 시행령 개정을 통해 재량근로시간제 활용률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장기적으로 입법을 통해 미국의 근로시간면제제도를 도입해 사무직 관련 유연근로시간제를 종합적이고 통일적으로 정비해야 한다고도 했다.

미국의 경우 1938년에 전형적인 사무 관련직 유연근로시간제로 근로시간면제제도(화이트칼라이그젬션)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근로시간으로 성과를 평가받기 어려운 화이트칼라 근로자에게 업무시간배분 재량권을 주고 성과에 따라 생산성을 평가·보상하는 제도다. 일정 수준의 소득기준을 충족하는 전문직, 관리직, 사무직 등이 제도 적용 대상이다.

<글 싣는 순서>
1회/“52시간 근무해도 IT기업은 망하지 않아요”
2회/“피해자는 있었지만 가해자는 없었다”
3회/“과로사와 과로 자살은 뭐가 다른가요”
4회/몰랐고 모른 척 했다
5회/미국의 실리콘밸리엔 야근이 없다?
6회/기준이 필요하다, 표준계약서·야근 수당’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박태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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